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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Sep 06. 2024

'젓가락 살인'은 저희 도서관에 없습니다

도서관 근무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전직 나의 직업은 한 기업의 홍보담당자였다. 기업의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언론사 기자들과의 릴레이션십을 구축하는 게 주 업무였다. 바쁜 시즌에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살았으니, 회사에 위기가 터지면, 하루에도 100 통도 넘는 통화를 했다. 늘 팩트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직업이었으므로 늘 귀와 입의 긴장도가 높았다. 그러나 나의 청력이 나의 업무에, 기업에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나의 청력은 '정상'이었다.



자, 본격적인 도서관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내가 지금까지 브런치에 쓴 도서관 업무 카테고리는 이러하다.


책 대부업- 책을 한도에 맞게 대출한다. 단 연체 시 이자는 없다.
책 탐정업- 책의 대출이력, 즉 책의 과거까지 캘 수 있다. 어쩌다 잘못 꽂혀 있는 책이라도 끝까지 찾는다.


오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업종을 더 추가한다.

바로 콜센터업이다. 도서관 콜센터를 통해 이용자들은 책에 대한 각종 민원을 해결한다.

이 업무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려면 '청력', 좀 더 심도 있게 말하면 '어음변별력'이 좋아야 한다.


다음은 실제 상황이다.


'띠리링'

전화기가 울린다.


"안녕하세요. OO 도서관입니다"

"혹시 제가 대출한 책 반납일 연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곽미진입니다."

"네, 강미진 님 맞으신가요?"

"아뇨 곽미진입니다."

"그러니깐 강물 할 때 강 맞으신가요?"

"아뇨. ㅗ에 ㅏ, 곽입니다 곽!"

벌써 이 이용자는 대출반납 연기를 하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났다.

그러나 어쩌랴

곽/강은 내 귀에는 진짜 비슷하게 들리는 걸.

하지만 이 정도 실수는 매우 하급에 속한다.

'성명 리스닝'은 나이와 자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2주 전쯤의 일이다.

개학을 앞둔 터라 방학숙제로 독후감을 제출하던 시기였다.

역시 '띠리링' 전화가 울린다.

"안녕하세요. OO 도서관입니다"

"어린이 책인데, 지금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나는 가끔 이런 흥겨운 여흥구를 붙인다. 뭐든 찾아주겠다는 서비스 마인드의 외적 표출이다.

"책 제목을 말씀해 주세요."

"네, 젓가락 살인이요"

살인?

순간 생각의 속도가 평소보다 만 배는 빨리 움직인다.

-어린이 책에 살인?

-그것도 젓가락으로?

-이 책 스릴러야?

-아니면 파리 모기 살인 같은 코믹이야?

별별 생각이 어마무시한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동시에 업무용 검색창에 '젓가락 살인'을 검색했다.

없다. 젓가락 살인이라는 책은 없다

혹여, 띄어쓰기의 문제인가 싶어서 '젓가락살인', '젓가락 살인'으로

이리저리 시도해 봐도 우리 도서관에 그런 책은 없었다.

살짝 아쉬운 감정을 실어 넣어서 답을 한다.

"에고, 저희 도서관에는 젓가락 살인이라는 책은 없습니다"

그때 나의 속마음은 이랬다.

우리 도서관에 그런 무시무시한 어린이 책은 없습니다.

아쉬워할 줄 알았던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온다.

"아니, 저 젓가락 살인이.. 아니라 젓가락 달인이요"

이럴 수가!

책제목은 젓가락 살인이 아니라 젓가락 달인이었던 것이다.

달인을 살인으로 듣다니

오만가지 상상을 한 나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사과가 먼저 나왔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살인이라고 들었어요."

라고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크으큭~ 크큭.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젓가락 달인이라는 책은 있었다.

평소에 잘 나가는 책이었다.

정말 나 미쳤나 봐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과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그 선생님도 얼마 전에 어떤 책 제목 때문에 한 동안 뇌가 정지되었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OO 도서관입니다"

"책 좀 찾아주실 수 있나요?"

"네 말씀하세요"

"투엑스라지 어쩌고 저쩌고 책 있나요?"

"네 투엑스라지요?"

투엑스라지라.... 어떻게 표기를 해야 할지 대략 난감.

일단 들리는 대로 투엑스라지를 한글로 검색했다. 1차 실패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투엑스라지 레오타드 어쩌고 저쩌고"

네오타드? 레오타드?

일단 네오타드로 검색했다.  2차 실패

"죄송하지만, 한 번 더~?"

슬슬 이용자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투엑스라지 레오타드 안나수이 저쩌고요

안나수이 ~ 그 하나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3차 도전 성공

드디어 책을 찾았다.

책의 정확한 제목은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었다.

혹자는 이런 걸 왜 못 들어하겠지만

XXL 이게 옷가게에서나 입에 착착 붙지, 도서관에서는 결코 쉬운 난도의 리스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서관 콜센터의 최고난도 리스닝은 무엇일까?

바로 원서책이다. XXL 하나로도 당황스러우니, 원서책을 찾아달라는 문의는 어떠할까

콜센터에 원서책 리스닝이라도 들어야 할 때는 1년 치 에너지를 나의 청력에 다 발휘해야 하니

그날 나의 귀는 업무과다로 혹사당하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서책은 이용자가 홈페이지에서 스스로 검색해서 찾는 것이 최고의 에티켓이다.



이렇게 5년 전 멀쩡했던 내 청력은 서서히 노화되고 있다.


나는 두렵다. 혹여라도, 나의 퇴화되는 청력으로 서비스 질이 떨어지고, 전달이 잘못되고, 상대에게 화를 돋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끔 대형마트에서 보청기 홍보 부스가 나오면 가웃가웃 거리게 된다. 정 안 되면 보청기라도 낄 작정이다. 6돋보기를 영접할 때도 얼마나 신세계를 맛보았던가. 샴푸의 제품성분을 독해하며 당당히 마트 장바구니에 담았던 설렘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나의 모든 신체적 기능은 퇴화되는 날만 남았다.

생각해 보면 퇴화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마음뿐이니, 보청기를 끼는 전날까지 나는 '마음의 소리'라는 보조 배터리를 풀가동시킬 예정이다.


'띠리링'

도서관 전화기가 울린다.


두세 번 호흡을 한다.

온 에너지를 귀에 집중한다.

마지자음 모음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나의 온 마음은 지금 전화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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