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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Oct 06. 2024

도서관에 온 부부관찰기

어느 한 번의 계절이었다. 남편과 산에 올랐던 계절이 있었다. 러닝화를 등산화로 바꾸고, 청바지를 등산복으로 바꾼 후, 겨울이 왔다. 내년 봄을 기약했으나, 남편은 그 사이 취미를 골프로 갈아탔다. 부부 산행은 그 한 계절이 전부였다.


단 한 번의 계절이었으나 산에 다니면서 내가 가장 감격했던 순간은 정상에 올랐던 순간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커플을 본 순간이었다.  짜릿한  밀애를 목격한 이후 산에 오르는 멀쩡한 부부들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부부 관찰기는 나의 일터인 도서관에서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머~ 도서관에도 불륜 커플이 온다고?

라고 혹시라도 기대하셨던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한 말씀부터 드리겠다.

도서관에 온 부부는 한결같이 순도 99.9% 순금 같은 부부였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부부관찰기에서는 그랬다.


많은 부부를 보았다.


자녀 교육으로 의기투합하여 마트용 돌돌이 수레에 책을 한가득 실고 오는 30~40대 부부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르고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며 중년 독서의 본보기가 되는 40~50대 부부

눈도 침침하고 혼자서는 불안하여 몰라도 같이 다녀야 의지되는 60~70대  부부


그런데 이 부부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한쌍이 있었으니

그들의 나이는 80대는 족히 넘어 보였다.


그분들은 지난여름, 우리 도서관의 VIP였으니 매일 함께 오셨다.

할아버지는 오실 때마다 엉뚱한 책 제목을 대면서 찾아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그럴 때마다 옆에 계신 할머니는 내 남편이 아닌 듯,

모른 척 앉아 책만 읽으셨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집에 가실 때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따라나가셨다.

아무리 애정이 없는 남편이지만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만 급히 도서관에 오셨다.

생전 말씀이 없으셨는데 다급한 목소리로

혹시 우리 집 할아버지 여기 오시지 않았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할머니 말씀은 할아버지가 치매가 있으셔서 항상 같이 다니는데

가끔씩 이렇게 본인의 시야에서 놓칠 때가 있다고 했다.

그저 무심한 듯 책만 읽으시던 할머니의 행동은

사실은 보살핌이었던 것이다.  

지난번 할아버지 말씀 중에 '내가 어제 도서관에서 퇴근하면서 여기다 놓고 간 책'을 찾아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문득 도서관에 오는 것을 출근이라 여기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젊었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신 분이셨을까?

할머니의 독서 자세도 예사롭지 않던데, 젊은 시절 두 분 모두 공부를 많이 했던 부부였을까?

두 어르신 부부에 대한 호기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아직 중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닐 테니

그나마 도서관을 출근 삼아 오시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도서관에서 다시 뵈었으니, 할아버지를 찾으신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다른 도서관 선생님들과 나눈 적이 있다.

그 도서관에서는 아주 귀여우신(?) 80대 부부가 오신다고 했다.

무더위가 40도를 웃도는 여름날이었다.


6시 마감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데스크로 오시더니

"6시까지죠? 우리 집 양반 좀 데리러 갈라고 왔는데..."

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밤 10시까지 운영한다고 했더니

"아, 그럼 날도 더운데 여기서 더 있으라고 해야겠네"

라며 순간 얼굴에 대낮 같은 화색이 돌았다.

그 뒤 할아버지와 나눈 떠들썩한 대화는

그야말로 엄마와 유치원 아들의 실랑이와 같았으니


엄마는 좀 더 책 읽다 와라

아들은 집에 가고 싶다

엄마는 여기처럼 시원한 곳이 어딨냐

아들은 나, 배고프다

결국 아들은 배고픔이라는 카드를 내밀었으니

배고픈 아들을 이길 엄마가 어디 있으랴


할아버지는 할머니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 나가셨고

더 계시라할 심산으로

화색이 돌던 할머니의 얼굴은 그냥 화로 바뀌셨단다.


너무도 식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치매 남편이 길이라도 잃을까 매번 도서관에 동행하는 것도,

무더운 여름 남편을 시원한 도서관에 좀 더 있게 하고 싶은 것도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젊은 남편들은 수십 권의 책을 아내 대신 번쩍번쩍 들어서

대출하고 반납하고 밀고 끌고 간다.  

그야말로 듬직한 짐꾼이 되어 준다.

그런데 그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짐꾼이 아니라 짐짝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배우자들은 젊은 시절 나눴던 사랑과 의리를 끝까지 지켜나갔다.

적어도 내가 도서관에서 관찰한 부부들은 그랬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갑지 않은 계절 탓인가

이상하게 도서관에 오는 부부들의 발길이 줄었다.

그들은 어디서 사랑을 나누시나

걷기 좋은 계절이니,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일광욕하며 함께 걷고 계시려나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뜨거운 히터가 그리운 계절이 오면

도서관만 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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