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달리던 차가 예상치 못한 안개 구간으로접어들었다.출발할 때만 해도 멀쩡했던 가시거리가 집에서 5km 떨어진 곳부터 흐려졌다. 천변을 따라 퍼져나간 안개 탓이다.
안 보이네, 어디로 가야 하지? 매일 오가던 길인데도 앞이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에 휩싸였다. 지금 믿을 건 500m 앞 우회전하라는 네비 음성뿐. 차들은비상점멸등과 안개등을 켠 채로 서로의생존을 위한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가자. 방도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불현듯 그 공허하고도 간절한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한때 그 말은 그날의 컨셉이었고, 그 행사의헤드라인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가 아니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진풍경을 그 말은 가장 잘 담아냈다. 또한 그 말은 우리와 마주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딱 이 맘 때였다. 11월 중순부터 12월 말 사이. 매해 그날은 구름처럼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그곳은 바로 수능 성적표가 나온 직후에 열리는 대학 입시 설명회장.
6년 전 퇴사했던 전 직장은 대입 컨설팅과 인터넷 원서접수를 하던 입시교육 회사였다.17년 회사를 다니는 동안 수십 번의 입시설명회를 치렀다. 잠실 종합운동장에서부터 대학 강당, 구청 시청의 강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열렸다. 12월 초 수능 성적표를 받은 후 열리는 입시설명회를 실채점 입시설명회라고 불렀다. 국내 최고라는 입시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배치표(가군, 나군, 다군) 3장을 받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줄을 서서 입장했고, 자리가 없으면 계단에 앉아야 했다. 유수의 입시기관에서 같은 날 설명회가 열리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배치표를 받기도 했다. 어느 해 만난 학부모 중에는 휠체어를 탄 분도 있었으니, 얼마나 그것이 간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해 수능 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매년 다른 이유로 입시설명회장은 붐볐다.
수많은 수험생과 학부모도 몰렸지만, 그날 설명회에는 방송국과 일간지, 인터넷 매체의 카메라 기자들도 함께 모였다. 매체 특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17년 동안 그들이 원하는 카메라 앵글은 단 한 컷이었다. 수많은 군중이 배치표를 바라보는 가장 간절한 눈빛,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강연자의 입을 따라가는 가장 절실한 눈빛.
어디로 가야 하지?
가고 싶은 대학과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의 간극차는 너무 컸고, 설사 점수가 잘 나왔다고 매년 다른 이슈들로 흔들리는 입시 결과와 경쟁률에 따라 출렁이는 합격선, 상향, 적정, 하향을 놓고 가늠질할 수밖에 없는 눈치작전에 누구도 합격을 확신할 수 없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수록 우리의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그 회사를 다닐 때 초등학생이었던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매일 1시 2시까지 공부를 한다. 아침도 거르고 7시 30분이면 학교 자율학습을 하러 집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내 아이만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진학이 목적인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공부한다. 모두들 그렇게 공부를 해도 전교에 단 8명뿐인 1등급을 맞기는 어렵다. 1등급이 뭐야, 2등급, 3등급 맞기에도 목을 맨다. 내신이 이 정도인데, 수능을 어떨까, 실력 짱짱한 재수생과 영재고, 과학고, 특목고 강남 8학군 수험생들이 1, 2등급을 다 가져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일반고 아이들이 믿는 것은 그나마 수시뿐이다. 그것도 일부 내신 좋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깜깜이 입시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학생부종합전형에 그 해 운을 건다.
어디로 가야 하지?
딸은 겨우 고1인데도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를 매일 본인 스스로에게 묻는다. 입시의 현실이 이러할진대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든 그때의 입시설명회장은 어떠했을까 싶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안갯속에 갇혀있던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절실했을까? 대학 가는 길을 명쾌하게 짚어드린다는 슬로건 자체가 위선이고, 다분히 선동적이었음을 뒤늦게 후회해 본다.
출근 후 모닝커피를 한 잔 하는데 동료가 딸 자랑 하나를 해도 되냐고 했다. 얼마든지 좋았다. 그런데 그것은 듣고 나니 자랑 정도가 아니라, 감동 그 자체였다. 동료에게는 학원도 다니지 않고 열심히 혼자 공부하는 쌍둥이 딸이 있다. 그중 첫 아이가 지난 중간고사에서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될 엄청난 실수를 했다. 지구과학 시험에서 객관식 OMR 답안지를 체크하지 못한 것이다. 시험을 몇 분 남기지 않고 서술형 답안을 다 쓰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우왕좌왕 울고불고했으나 결국 객관식은 0점 처리되었고, 겨우 서술형 답안으로 점수를 건졌다. 시험지로 채점했더니 단 1개만 틀렸다.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그 아이에게 지구과학은 자신의 약점 과목인 수학과목을 만회해 줄 전략과목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너무도 대견하게도 금세 털고 일어나더니, 차분히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더란다. 엄마가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냐고,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어차피 대학은 행복한 인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어, 비록 실수는 해서 많이 아팠지만 수단이 변경되는 건 괜찮아. 갈 수 있는 대학이 달라지면 좀 어때. 내 인생은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갈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엄마"
그래, 행복
바로 그거였다. 자욱한 안개 같은 입시 지옥 속에서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대학은 우리 인생의 경유지일 뿐,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행복한 삶이여야 한다.
올해는 12월 6일에 수능 성적표가 배부된다고 한다. 우리 딸 기말고사도 9일부터 치러진다. 나도 부모인지라 그들에게 닥친 수능 성적표보다 내 딸의 기말고사 성적표가 더 걱정이다. 비록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깨달은 것이지만 동료 딸이 깨달은 그것을 부디 우리 딸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너무 늦지 않게, 너무 큰 실수는 하지 않고 말이다.
곧 수능성적표를 받게 되는 대한민국 수험생, 학부모 여러분, 모두 화이팅입니다. 우리 모두 점수에 지지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