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근무를 마치고 퇴근했더니, 집에 케이크가 두 개, 아니 네 개나 있었다. 미니케이크 3개는 작은 딸이, 큰 케이크 하나는 큰 딸이 만든 것이다. 케이크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것이다. 생크림은 혹성의 겉표면처럼 울퉁불퉁 덮이고, 비싼 딸기는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 그래도 일단, 못생긴 케이크에 대한 속마음은 생크림 속 카스텔라처럼 감춰두었다. 나의 리액션은 '와~ 맛있겠다' 정도. 결코 예쁘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우리 딸들은 왜 케이크를 만들었을까?
먼저 작은 딸의 사연은 이러했다. 지난 목요일, 드디어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시험 후 계획은 대학 캠퍼스 투어를 간다. 여의도를 나간다 했지만, 몸의 피로는 쌓이고, 공부한 만큼 성적은 나오지 않은 탓인지 이틀을 친구들과 노래방과 볼링장으로 전전했었다. 급기야 3일째 되는 날은 케이크이라도 만들고 싶다며, 지돈지산하며 소소하게 사놓은 베이킹 도구들을 꺼냈다. 나는 출근해서 못 봤지만, 함께 있던 친정 엄마 말로는 6시간을 스마트폰을 봐가며 끙끙대며 만든 케이크라고 했다.
첨에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재료를 살 때는 걱정이 앞섰었다. 제빵에 재미가 들려 허구한 날 빵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주기를 바라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마땅치 않았다.
카스텔라를 구울 때만 해도 할머니에게 그랬단다.
"할머니, 할머니네 집 재개발 보상금 나오면, 저랑 베이커리 카페나 차려요"
그런데 6시간을 공들여 만들었는데도 생각보다 케이크 만드는 과정도, 결과도 시원치 않으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할머니 취소예요. 그냥 공부나 할래요"
투자자까지 모집한 빵집 사장은 6시간짜리 꿈이 되었다.
자, 그럼 큰 딸의 수제 케이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큰 딸은 장애를 가졌다. 지금 다니고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서는 경기도의 예산을 받아 성인 장애인들의 주말 돌봄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토요일, 주 1회 가는 것이지만프로그램이 좋았다. 원예, 풍선아트, 제빵 등 여가 활동 프로그램,영화와 같은 문화 프로그램 등 장애인들이 쉽게 접해볼 수 없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점심밥값 예산도 풍족해서 복지관 점심 급식과는 다른즐거운 식도락을 맛볼 수 있었다. 부모도 매주 해 주기 힘든 다양한 활동 등을 나라에서 제공해 준 것이다. 이렇게만 세금이 쓰일 수 있다면 작금의 기막힌 사태와는 무관하게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마지막 날이 된 것이다. 그래서 미리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든 것 같았다. 비록 준비된 케이크시트에 크림과 토핑들을 장식한 케이크이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소근육 활동도 자유롭지 않으니 생크림을 짜는 과정도 쉽지 않을 터이고, 토핑을 얹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 완성된 케이크도 선생님들의 손이 많이 더해졌으리라. 그래도 복지관에서 카톡으로 보내 준 사진 속딸의 모습은 '케이크 만들기 대회 우승자' 같은 기쁨이한가득 담겨있었다.
큰 딸 케이크(좌), 작은 딸 케이크(우)
이렇게 두 딸이 만든 케이크는 운명처럼 같은 날 만들어졌다.
문득, 딸들이 태어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둘 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얼레벌레 마취에서 깨어난 후, 배를 찢은 고통이 엄습하던 찰나에 아기를 안아볼 수 있었다. 아기를 본 첫 느낌은 어땠을까?
세상의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예쁜 줄만 알았다. 그날 내가 낳은 딸들을 보기 전까지는.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것이다. 마치 이 케이크처럼 말이다.딸기같이 붉은 얼굴, 쭉 찢어진 눈매, 납작한 코, 이쁜 건 딱 하나 오물조물 거리는 입뿐이었다. 너무 예쁘다는 마음은 쏙~ 들어갔다.
못 생긴 케이크를 보는 순간, 엄습했던 기시감이란 이런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오늘 내가 본 못생긴 케이크만큼이나 못생긴 딸들은 23살, 16살 아가씨로 예쁘게 자랐다. 감성지수만큼은 세 자리인 큰 딸. 다행히 지성지수가 세 자리인 둘째 딸. 서로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보듬어 주며 살기를 바라는 나의 욕심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다. 그 말은 우리 둘째에게는 쇳덩어리 같은 버거운 토핑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온에 오래 놔두면 무너지는 생크림처럼 아이의 마음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사는 동안은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신선한 생크림 케이크처럼 신선하게 살고 싶다.
그럼 이제는 시식의 시간,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케이크의 맛은 어땠을까?
먼저 작은 딸이 만든 케이크를 먹기로 했다. 세상 가벼운 빵칼로 작은 케이크의 심장부를 도려낸다. 작은 티스푼이 심장의 한 부분을 떼내어 입 속에 넣는데... 이 맛, 못생긴 케이크의 맛! 이거 이거 완전 반전 스릴러네.
생크림의 달콤함, 카스텔라의 부드러움, 생 딸기의 신선함, 크림치즈의리치함, 장장6시간 동안 쏟아부은 둘째 딸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맛이었다. 티스푼 5개가 달려드니 금세 순삭. 아무리 맛있어도 우리는 한국 사람이었기에후식으로 된장찌개와 김장김치까지 먹었더니 배가 가득 찼다.
아무래도 큰딸이 만든 케이크는 내일 먹어야 할 것 같다.사실 이건 먹지 않아도 안다. 이건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먹어야 하는 케이크이다. 그래서 이 맛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도 흉내 내지 못할 맛'이라는 걸 우리 모두는이미 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