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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찹의 맛, 어린이의 맛

by 포도송이 Feb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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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롱~

빨간 혀를 낼름거리며 도망간다.

나 잡아봐라

노란머리 케찹뚜껑

잡히기만 해봐라

그렇게 까불다 머리통에 피난다.


                                <오린이의 디카시>

 


요즘 도시락을 싼다.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딸을 위해 일주일 두 번. 메뉴는 별게 없다. 김치볶음밥과 오므라이스가 퐁당퐁당.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계란 프라이가 1개가 아니라 2개. 그리고 꼭 데리야끼 소스를 뿌려야 한다는 것. 이상하게 데리야끼 소스를 뿌릴 때면  뭔가 아쉽다. 이건 아니지 싶다.


딸~  오므라이스에는 케찹이지!


사춘기를 거치면서 딸은 성격뿐 아니라 소스의 취향까지 변해버렸다. 어릴 때는 케찹을 정말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바깥음식을 두루 섭렵하더니 오리지널 케찹의 맛을 잊은 모양이다. 나도 어릴 때 케찹을 무진장 좋아했었다. 소시지와 함께 케찹이 밥상 위에 등장하던 날은 미국 어린이가 부럽지 않았다. 오뚜기가 아니라 하인즈 케찹을 뿌려먹을 때면 슈웅 하고 미국에 날아간 기분이었다.


남동생은 매번 케찹에  밥을 비벼먹을 정도로 케찹을 좋아했었다. 그 덕에 엄마의 케찹 요리는 날로 진화했다. 케찹 소시지 볶음, 케찹 떡볶이, 케찹 탕수육 등 다채로운 케찹 요리는 귀한 남동생 덕분에 먹을 수 있었던 우리 집 일품 요리였다. 특히 집에서 바싹 튀긴 돈가스에 케찹을 찍어먹을 때면, 세상에 그보다 맛있는 요리는 없었다.


학교 앞  핫도그와  위에 필기체로 휘갈겨진 케찹도 잊을 수 없다. 케찹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길게 빼고 가장 위태로운 아랫부분부터 핥아먹지 않았던가. 핫도그의  밍숭 밍숭한 밀가루 외피는 케찹의 맛 덕분에 새로운 맛이 되었다. 분홍색 소시지야 케찹 없이도 맛있었다.


케찹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계란프라이다. 어린 시절 냉장고에 계란과 케찹만 있으면 다섯 찬이 부럽지 잃았다. 계란 프라이에 데코레이션으로 하트를 그리면 계란프라이도 요리가 됐다. 케찹은 방귀도 잘 뀌었다. 케찹이 떨어질 락 말락 하면 케찹통을 거꾸로 세우고 꾹꾹 눌러댔는데 거의 빈 케찹통에 공기가 빠져나올 때면 삑삑 방귀소리가 났다.


몇 년 전 마흔 후반이었던 남편이 순수한 미소년처럼 보이던 날이 있었다. 그날 우리 집 점심은 피자였다.  배달된 피자와 함께 온 피클과 핫소스와 디핑소스를 식탁 위에 차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냉장고를 열더니 케찹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피자에 케찹이라니... 아직 어린아이 입맛 같은 남편이 그날 따라 꽤 귀여웠었다. 처음 하는 고백이다.


사실, 케찹의 바른 표기법은 케첩이 맞다. 케첩, 케찹, 케챱, 케쳡 참 헷갈리지만,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케첩이 바른 표기이다. 다만 '케챂'은 오뚜기의 상표명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에세이에 케첩을 케찹이라고 적는 것은 어릴 때 케첩의 맛은 케첩이 아니라 경쾌 발랄한 케찹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되면서 케찹의 맛을 알았고 어른이 되면서 케찹의 맛을 잃었다.


도시락을 싸는 요즘 케찹의 맛이 그립다. 볶음밥 위에 계란 하나, 그 위에 듬뿍 얹은 케찹, 그 시절의 맛이 입 안 가득 새콤달콤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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