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 한 접시가 주는 다정한 위로와 에너지
딸의 시험 기간이다.
에그샌드위치 조식 서비스, 학교 학원 하루 두 세번의 픽업 서비스, 세탁물 수거 서비스.
시험 기간에는 더 특별해지는 VVIP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벌써 열흘째다.
그러면 뭐하나? 엄마인 나는 시험의 ‘시’ 자도 물어보지도 못하는 걸.
"딸, 시험은 어땠어?" 물어봤다가는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며, 지랄과 발광이 동시에 빛이 난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맨날 딸은 ‘개망’이란다. 요즘 아이들 말로 ‘개망’은 ‘아주, 매우 망했다’라는 뜻이다. 평범하게는 ‘폭망’, 조금 귀여운 버전은 ‘똥망’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그래, 못 볼 날도 있지. 내일 시험 잘 보면 되지."
내가 생각해도 연기가 참 많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 그날도 딸은 시험에 개망한 날이었다.
"엄마, 나 지금 떡볶이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 시켜 먹어도 돼?"
순간 힘이 빠졌다. 시험을 망쳐도 떡볶이는 먹고 싶다니. 엄마인 나는 일주일 전 먹은 떡볶이도 역류할 것 같은데 말이다. 위장만큼은 참 단단한 내 딸이다.
배달앱을 눌렀다. 추가 주문사항이 어찌나 많은지 베이컨, 치즈, 달걀, 중국 당면에 배달료까지 합치니 2만 8천 5백원. 3만 원에 육박했다. 혼자 먹는 떡볶이 값치곤 너무 비쌌다.
‘집에서 해줄 수 있는데 굳이 배달?’, ‘혼자 먹는 떡볶이에 3만 원 가까이 쓰는 게 맞아?’,‘차라리 고기를 사다가 구워줄까.’
마트 전단지를 펼쳐 들고 가성비를 따지듯 꼼꼼히 계산했다. 결론은 너무‘과하다’였다. 결국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집에 가서 만들어 줄게. 냉장고에 있는 피자 먼저 먹고 있을래?"
"됐어. 안 먹어."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떡볶이를 시켜주지 않는다는 말에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표 떡볶이를 거부하는 딸이 한편 괘씸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라도 딸이 시험을 잘 봤다면 어땠을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3만 원, 아니 5만 원이라도 기분 좋게 시켜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부끄러웠다. 딸에게는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시험 결과에 알량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사과하는 게 맞았다. ‘미안하다’라는 말과 함께 ‘떡볶이를 주문했다’는 카톡을 전송했다.
이런 걸 돈 쓰고도 욕먹는다고 하는 걸까? 이미 서운해진 딸의 마음도 미안해진 나의 마음도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 떡볶이에 얽힌 추억과 마음은 유독 오래 남았다.
1979년,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우리 집이 잠시 슈퍼마켓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바빴고 나는 종종 방치되었다. 그 무렵 동네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생겼다. 드디어 엄마표가 아닌 길거리표 떡볶이를 맛보게 된 것이다. 빨간 맛은 황홀했다. 욕망은 떡을 치고, 고추장은 불을 지폈다.
얼마 후, 100원이 생기자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떡볶이 100원어치 주세요."
엄마에게 혼날 날 것 같은 두려움은 있었지만, 수북하게 담긴 떡볶이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돌아왔다. 역시 집에서 기다린 건 떡볶이보다 더 매운 엄마의 호통이었다. 엄마의 화는 나의 일탈뿐 아니라, 100원이라는 금액에도 있었다. 나를 데리고 떡볶이 포장마차로 향했다.
"50원어치도 겨우 먹는 애한테 100원어치를 팔아도 되나요?"
엄마는 나의 작은 위장을 볼모로 요목조목 따졌다. 떡볶이집 아줌마가 밀떡 몇 가닥을 빼돌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나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50원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떡볶이 100원어치를 함부로 사 먹지 않겠다는 납득할 수 없는 맹세를 했다.
이후 ‘떡볶이 100원어치 사 먹기’는 내 꿈이 되었다. 국민학생이 되자 용돈을 아껴 떡볶이를 사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등하굣길은 엄마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떡볶이가 먹고 싶은 날은 구멍 난 양말만큼이나 흔했다. 가령 명절 전날에도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기름 냄새가 가득해도, 산해진미가 쌓여 있어도, 동생들을 꼬드겨 떡볶이집을 찾아다녔다. 문을 연 가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구멍 난 양말이 감쪽같이 꿰매졌을 때만큼이나 컸다.
떡볶이가 위로의 음식이 된 건, 중고등학교 무렵이었다. 도서관 앞 떡볶이는 어른들의 박카스 같은 밀가루계 자양강장제였다. 떡볶이만 먹으면 시험에 기죽은 납작한 마음도, 엉덩이도 몽실몽실 탄력을 얻었다. 다시 해보겠다는 의지가 철판 위 국물처럼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중간고사를 망친 딸의 마음도 그때의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문득 7년 전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떠올랐다.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순간에도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떡볶이였다. 떡볶이는 대체 불가한 한국인의 소울푸드, 다정한 친구 같은, 때론 다시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였다.
명절 기간이면 꼬치 전, 동그랑땡, 깻잎전, 버섯 전…. 온갖 전들이 기름탕 위에서 온종일 지글거린다. 그때 가장 반가운 음식은 당연히 떡볶이다. 그때의 떡볶이의 맛은 5성급 호텔의 최고급 스테이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딸도, 나도, 우리 가족도 떡볶이는 명절 연휴에 먹는 만장일치 메뉴다. 그때는 5만 원, 아니 그보다 더 비싼 가격이라도 아낌없이 사 먹을 것이다. 물론,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도 있지만, 바깥 음식이 주는 해방감도 함께 맛보아야 할 기쁨이다.
밀떡 한 봉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삼지창 같은 포크로 떡볶이를 찍는다. 매콤달콤한 소스와 말랑한 떡살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시험도, 명절도, 오늘의 피로도 그 한입에 사라진다. 뜨겁고 매운 그 맛 속에 오늘의 위로와 내일의 힘이 간절히 숨어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실린 기사를 살짝 변주한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