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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 뺐더니, 평론가가 제안해준, 필명

이인자에서 '이'를 뺐더니, 필명이 되었다. 인자한 작가가 되었다.

by 포도송이 x 인자

(프롤로그)


<포도송이 작가가 '오린이의 동심세계'에서 왜 '인자로운 세계'로 연재를 시작했는지 그 비밀을 공개하는 글이다. 그리고 언젠가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다. 내 삶에 일어난 촌극이 이름 때문이라 여기는 분들, 그리고 일인자가 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이인자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2025년 5월, 제9회 경기히든작가(경기콘텐츠진흥원) 당선 소식을 들었다. 다시 글을 쓴 지 1년 만에 얻은 성과여서 중년에 늘어진 자신감이 다시 탄력을 받았다. 일종의 인생 리프팅이었다. 출판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생일대의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필명.


이름만 들어도 문장이 살아 뛰고, 봄 햇살 위 윤슬처럼 반짝이는 필명을 갖고 싶었다. 박완서, 박경리의 묵직한 이름에서부터, 이슬아, 김혼비, 성해나의 반짝이는 이름까지, 나는 그 이름들만큼이나 멋진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랬다. 나에게는 이름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 이름은 이인자. 일인자도 아니고, 그저 이인자였다. 누가 들어도 중년을 훌쩍 넘어선 듯한 이름. 책을 낸다 한들, 과연 누가 사서 읽어 줄까 싶었다. 촌스럽기도 했지만, 언제나 착한 선택만 강요하는 듯한 ‘인자함’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번이 기회였다.


<살인자의 기억법> 이 된 어린 시절의 내 별명


"야, 살인자."

"이인자가 살인자래요."


내 이름은 언제나 놀림거리였다. 모조리 선생님께 일러바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냥 얼굴만 붉혔다. 내 편이 있을 땐 화를 냈고, 없을 땐 못 들은 척했다. 무반응이 최고의 무기였다.


그때 가장 원망스러웠던 건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존함은 ‘이준석’. 1921년에 태어나신 분 치고는 너무도 세련된 이름 아닌가. 그런데 그런 분이 21세기를 살아갈 손녀에게 ‘이인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다니. 이건 블랙코미디였다. 더 서운한 건 부모님이었다. 옆에서 말리지도 않고, 엄마 이름보다도 더 촌스러운 이름을 딸에게 남기다니. 부모로서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엄마, 엄마는 딸 이름을 이인자로 짓는데, 그냥 가만있었어?"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갓 시집온 새댁이 무슨 힘이 있냐고 했다.


‘자’로 끝나는 이름의 업보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또 딸이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이름 짓기에 흥미를 잃으셨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작명소로 향했다. 덕분에 내 동생은 ‘○희’라는, 남부럽지 않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승철의 「희야」가 전국을 휩쓸던 시절. 이름 끝에 ‘희’를 단 여자들은 모두 자신이 노래의 주인공이라 착각했다. 환호, 탄성, 설렘… 내 동생도 그 행운을 누렸다. 나는 그 이름이 겁나게, 정말 미치도록 부러웠다.


이름만 이뻤어도, 내 청춘은 달라졌을 거야


대학생이 되고, 미팅을 나갔다. 한껏 멋을 부렸다. 멋은 부렸지만 솔직히 엄청 이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생긴 편도 아니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아주 작지 않았고, 코는 제법 오뚝했고, 앞니가 살짝 삐뚤어졌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냥저냥 볼만했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스무 살의 여대생이었다. 이름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나는 '미현', '지영', '지연', '영미'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름을 밝히는 순간이 왔다.

"국문학과 93학번 이인자입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시대는 순식간에 70년대로, 어쩌면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내가 서른 살 무렵,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안방극장을 휩쓸었다. 뚱뚱하기도 했지만, 이름 때문에 촌스럽고 뒤처진 존재로 낙인찍히는 김삼순의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 같았다. 내 이름 콤플렉스와 겹쳤다. ‘희진’으로 살아가고 싶은 삼순의 마음, ‘희진’이었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원망이 이해되었다. 나도 ‘인자’가 아니라 ‘인희’나 ‘인아’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삼순은 나보다 나았다. 결국 현빈과의 사랑을 얻었으니까. 해피엔딩이었다.



이인자가 어때서, 가끔 그냥, 뻔뻔해지기도 했다


외모는 현빈도 원빈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름만큼은 세련된 남자와 결혼했다. 시아버지의 인상이 참으로 인자했다. 분가를 해주겠다고 했음에도 인자함에 이끌려 자발적 시댁살이를 선택했다. 애를 낳으면 키워주시겠다는 말에 넘어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며느리에겐 최적의 선택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도 엄마처럼 첫 딸을 낳았다. 다행히 나의 시아버지는 손녀딸의 이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남편과 나는 딸의 이름을 지수라고 지었다. 딸이 지수라고 불리자, 나는 지수 엄마가 되었다. 이인자가 아니라 누구누구의 엄마라고 불리던 시절이 나는 참 좋았다. 명함에도 지수 엄마라고 새기고 싶을 만큼.


그리고 7년이 지났다. 나는 또 딸을 낳았다.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삶의 지뢰밭을 밟으며 나는 더 단단해졌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다시 차장으로 회사 내에서의 위치도 자꾸 올라갔다. 나의 육체는 넉넉해지고, 마음은 뻔뻔해졌다.


“제 이름은 이인자입니다.” 그렇게 소개하는 순간은 목적지로 향하는 신호등처럼 흔했다.
초록불이 켜지고 길을 건너듯, 나는 ‘이인자’라는 이름을 건넸다.


사람들은 가끔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농담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인자면, 일인자는 누구세요?”
“맨날 이인자만 하시고, 언제 일인자가 되세요?”


그들에게는 신선한 농담이었겠지만, 나에겐 지겹도록 들은 대사였다. 응답은 그때그때 달랐다.


“이름만 이인자지, 일하는 건 일인자예요.”
“전 이인자가 좋아요. 일인자는 양보해야죠.”
“이인자도 감지덕지죠. 삼인자가 될 뻔했거든요.”


세 보이고 싶을 때, 겸손해지고 싶을 때, 의기소침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다른 대답을 꺼냈다. 어쨌든 그 모든 대답은 내 진심이기도 했다. 한때는 나도 일인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다. 일인자의 자리는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자리라는 것을. 오히려 이인자의 자리가 더 낫다는 것을. 조직도, 인생도 결국 오래 버티는 자가 승리자였다.



그래도, 필명만큼은 '인자'가 되기 싫었지만


경기히든작가 시상식 날, 점심 자리에서 멘토 김성신 평론가님이 물으셨다.


“이인자 선생님은 책을 본명으로 내실 건가요? 혹시 필명을 쓰신다면 제가 하나 제안드려도 될까요? ‘이’를 빼고, 그냥 ‘인자’는 어떠세요?”


그 순간 마음이 접시 위의 애플파이처럼 바스라졌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이름이 필명이 되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단은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내 이름 하나로 가득찼다.


필명 '인자'.


어질 인(仁), 자애로울 자(慈). 그렇게 뜻을 붙여 보았다. 어질고 자애로운 사람. 언어의 영혼까지 곱씹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를 떼고 불러 보니, 그 이름은 생각보다 촌스럽지 않았다.

과연 나는 인자로운 사람이었을까. 인자한 딸로, 인자한 며느리로, 인자한 아내로, 인자한 엄마로 살아왔을까.그리고 생각했다. 독자들에게 내가 주고 싶은 건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를 울리고, 또 웃기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문장을 쓰고 싶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인자’라는 필명은 부끄러움도, 촌스러움도 아니었다. 결코 부족한 이름이 아니었다.

가족과 친구 열 명에게 물었다. 모두가 ‘인자’가 좋다고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내 이름이자 나의 필명은 ‘인자’로 남게 되었다.


내가 이름이 촌스럽다며 투덜거릴 때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름 바꿀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평생 밥 벌어먹고 살 이름이다.” 할아버지의 가스라이팅에 결국 개명에 주저했다. 혹시라도 밥을 굶게 될까 두려웠다.

그 말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의 삶에서, ‘인자’라는 이름으로 쓰는 문장이 누군가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는 기꺼이 인자로 살아가겠다. 촌스러운 이름과도 화해하겠다.


(에필로그)


브런치 이웃 작가님들께


지난 달, 오마이뉴스에서 청탁이 왔습니다. 몇 번 기사가 실릴 무렵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편집기자님께서 제 이름에서 사연을 느끼셨나 봅니다. 저에게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써달라구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습니다. 마침 제 본명을 언제 공개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브런치에는 '인자로운 세계' 연재를 시작했으니까요.


이인자에서 포도송이로, 그리고 '인자'라는 작가가 탄생되는 이 모든 상황이 운명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이름을 '인자'라고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빅픽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브런치에는 앞으로도 '포도송이'로 활동할 계획입니다. 인자롭게 글을 쓰는 '포도송이'가 되겠습니다. 다만, 10월 말쯤, '인자'라는 이름으로 제 책이 나올 때, 많이 낯설어하시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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