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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처럼

꺾여도 그만두지 않는 마음으로

by 포도송이 x 인자

계란을 삶았다. 작은 냄비에 계란 두 알을 넣고, 봉긋하게 잠길 만큼 물을 부었다. 껍질을 잘 벗기려면 소금이나 식초를 넣는다지만, 겨우 두 알 삶자고 번잡해지는 것이 싫었다. 어떤 계란은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잘 벗겨졌다. 그냥 운에 맡기기로 했다.


계란이 익어가는 시간은 대략 10분. 스마트폰을 켜고 쇼츠 몇 개만 봐도 금세 지나가는 시간이다.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에 ‘착한 여자 부세미’라는 드라마가 자주 등장한다. 여주인공 전여빈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 그녀를 통해 ‘중꺽그마’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말했다. “중꺽그마.” 중요한 건 꺾여도 그만두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좌절, 희망을 연기해야 했을까. 비장하고도 순정한 열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중꺽그마’, 내 마음에도 슬그머니 넣어두었다.


맹렬하게 계란이 끓어오르는 시간이 10분하고 2분이나 더 지났다. 드라마 쇼츠를 보느라 지나친 2분은 노른자를 얼마나 퍽퍽하게 만들었을까. 찬물에 계란을 담가 식히는 동안 내 손의 짠내도 함께 씻었다. 이제 삶은 계란은 껍질만 벗기면 될 터였다.


이상하게 나는 삶은 계란 앞에서 서면 경건해졌다. 마치 수도승처럼 수련의 시간에 드는 느낌이었다. 잠시, 유튜브를 켜지 않는다. 앞꿈치가 많이 해진 큰딸의 운동화도 생각하지 않는다. 코스피가 4000을 넘어섰다고 세상은 떠들썩하지만, 은행에 묶어둔 몇 푼 안 되는 여윳돈의 근심도 잊는다. 오늘보다 더 악착스럽게 살아보겠다는 내일도 잊는다. 불경한 마음들을 모두 잊는다.


먼저 식탁 모서리에 톡톡, 삶은 계란을 쳤다. 노크소리 같았다. 이제 내가 껍질을 벗겨도 되겠느냐고 묻는. 어쩌면 그것은 벗겨질 계란에 대한 긍휼한 마음. 다정한 에티켓 같았다. 삶은 계란 껍데기가 매끄럽게 벗겨질 때면 묘한 쾌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삶이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삶은 계란은 그 반대였다. 계란 껍데기가 흰 살점에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에 호로록 풀리지 않던 쌀포대의 끈처럼 막막함과 조급함이 밀려왔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흰 살점을 움푹 파낼지라도 거침없이 벗겨낼 것인가, 시간이 더디고 상처는 남을지라도 조각조각 벗겨낼 것인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불경스러운 마음을 모두 지웠으니, 경건한 마음을 모아 천천히 벗기기로 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조각을 조금씩 조금씩 떼어냈다. 쉽지 않았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왜 이토록 미련하게 구는 것인가. 조급한 마음이 들수록 껍질에 붙은 살점이 커졌다. 순결한 흰 살결이 떨어져 나갈 때면 마음 한쪽이 패인 것만 같았다.


4분 20초, 54조각.


삶은 계란 하나를 벗기는데 든 시간. 껍질은 54조각으로 부서졌다.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다 벗겨진 계란의 표면은 매끈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였다.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상처 난 계란이니 소금을 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먹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내 눈앞에 있는 54조각의 계란 껍데기들이 54번을 쓰고 지워도 완성되지 않는 문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호로록 한 번에 써지지 않고, 결국엔 문장이 되지 못한 버려진 문장들. 껍질에 달라붙은 계란의 흰 살점처럼,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은 감정들을 날렵한 문장으로 완성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계란은 먹지도 않았는데도 목이 메었다. 계란 껍데기 같이 버려졌던 조각난 문장들이 문득 그리웠다. 중꺽그마. 그래, 중요한 건 꺾여도 그만 두지 않는 마음이지. 지금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삶은 계란 한 알을 54번 벗겨내듯, 너무도 어려운 글 한 편을 쓰고 있다.


소금을 치지 않은 삶은 계란은 심심했다. 목이 메었다.



곧 『삶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제 첫 에세이집이 세상에 나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 책, 그리고 그 안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제 삶을 담았습니다.

너무 두렵습니다. 매끈하지 않은 제 문장들이 누군가를 웃기고, 울릴 수 있을까요?

삶은 때로 이토록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요즘 목이 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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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