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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n 10. 2024

아가씨라는 한마디에 화장실 갈 기회를 놓쳤다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날이었다. 처음으로 휴일 하루를 국가에 바쳐 선거사무원으로 일했다. 무료 봉사는 아니다. 130,000원의 수당과 21,000원의 식대비까지 준단다.  새벽 5시 집합! 국가의 중요한 부름을  받았으니 동네 마트 가는 복장으로 출근할 수도 없는 일.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고 소풍 가기 전날처럼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이 감정은 설레발인가? 설렘인가? 어쨌거나 화장 머리까지 풀세팅 완료~


 그날 나의 임무는 선거인 명부 확인.  사실, 그 일은 나에게 기피 1호 업무. 6개월 전 쓰기 시작한  다초점 안경이 아직 완전 적응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시, 근시, 원시를 넘나드는 요즘, 러다 자칫  5000명이 넘는 선거인과 명부를 잘못 체크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6시 땡! 투표 오픈런이 시작되었다.   벌써 어르신들이 줄을 서신 모양이다.  선거인이 번호를 말하면 나는 두꺼운 명부에서 재빠르게 찾아야 한다. 끝이 아니다. 신분증과 실물을 대조하고 마스크를 쓰신 분은 마스크를 벗으시라고 철저히 안내해야 한다.

 

   다초점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세상은 두 개뿐. 명부 아니면 선거인 얼굴. 정말 쉴틈이 없다. 화장실 갈 틈도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석이라도 가져올걸, 의자는 왜 그리 딱딱한 건지,  렇게 9시간을 일한다면 오줌보 아니면 5번 6번 디스크 둘 중 하나는 터질 것 같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잠시~만 ' 하는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안내사무원의 목소리~


 "4000번 이상부터는 저 아가씨 한테 가세요"


 헉? 여기서 여자는 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저 아가씨의 인칭대명사는 나?

 순간,

 나는 화장실 시간을 놓쳤다.  


 아가씨의 일처리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알잘딱깔세'의 속도로 내가 맡은 명부를 확인했다. 뭐 안내사무원이 노안이었더라도 상관없다. 내 귀에 꽂힌 그 단어만 중요할 뿐. 다행히 그날 아가씨의 오줌보는 터지지 않았다. 물론 5번 6번 디스크도 무사했다.




 요즘 서점에는 일본 어르신들이 시, 센류가 유행이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책에서 이런 시가 나온다.


"젊어 보이시네요 그 한 마디에 모자 벗을 기회 놓쳤다" (오야 노시ㆍ남성ㆍ일흔여섯 살)    


"아가씨한테 가세요. 그 한 마디에 화장실 갈 기회를 놓쳤다" (OOO ㆍ여성ㆍ오십 한 살)

존경하는 시에 대한 나의 오마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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