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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n 29. 2024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집 텃밭에서 OOO 사망사건이 일어났다

죽었네 죽었어

아이고 아까워라

당신이 죽인 거 같은데?

내가? 내가 왜 죽여?

며칠 전에 당신이 그거 줬잖아


아침부터 소란이다.

혹시 옆집에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났나? 아니면 우리 가족 누구 하나가 살인자가 되었나?

스릴러물을 연상케 하는 우리 집 아침 대사다.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

대사의 주인공은 82세의 친정아버지와 77세의 친정 엄마

몇 해 전부터 큰 딸 집과 본인 집을 3:7로 오가더니, 요즘에는 텃밭을 핑계 삼아 7:3으로 큰 딸네로 눌러앉았다.


친정아버지는 평생 운전대만 잡다가 낫자루를 잡는 것은 올해가 두 번째인 초보 농사꾼.

친정 엄마는 부농의 딸이었으나, 농사가 지겨워 가난한 도시로 시집간 경력 단절 농사꾼.  

자, 등장인물의 캐릭터 분석은 여기까지 하고 오늘 사건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도대체 무엇이 죽었고, 어떻게 죽었고, 누가 죽였다는 것인가?

본론으로 넘어가면 죽은 바로 방울토마토 한 그루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곁가지를 정성스럽게 따주고, 허리가 휠세라 버팀대도 만들어주고

수도세 폭탄까지 감수하며 금지옥엽 키우던 방울토마토 다섯 그루 중 한 그루가

며칠 전부터 삐쩍 말라가더니, 급기야 오늘 아침 심정지 통보를 받았다.

물폭탄 심폐소생술도 무용지물인 상황.

엄마는 이번 방울토마토 죽음의 배후로 친정아버지를 지목했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펄쩍 뛰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타협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건을 수습하고자 남편과 나까지 현장에 급파되었다.


"바로 여기, 내가 니 아빠가 여기다 비료를 주는 걸 똑똑히 봤어"

<참고>친정엄마의 현장 증언 사진



엄마는 아버지가 며칠 전 비료를 주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아버지는 비료는 줬지만 독극물도 아니고 영양제를 준 게 뭔 잘못이냐며, 최종 자기 발언 시간을 가졌다.

 

이제 남은 건 그나마 농사 경력이 가장 긴 남편의 판결만 남았다.

아버님이 비료를 준건 잘못은 아니지만 뿌리에 너무 가까이 준 것이 직접적인 사망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위까지 저리 나오니 인정할 수밖에.

"그래 내가 아주 죽을죄를 졌다"

아버지는 본인의 죄를 인정하면서  텃밭을 빠져나갔다.


너무 가까이 비료를 줘도 죽는다.

너무 많이 비료를 줘도 죽는다.

너무 많이 사랑한 죄, 그것도 죄라면 죄다.


갑자기 나도 지난밤, 기말고사를 앞둔 딸과의 사건이 떠올랐다.

엄마가 을 먹으라고 해서 잠이 들었다

시험공부 못한 게 다 엄마 탓이라고 억지 주장을 해왔다.

그때는 하도 기가 막혀 버럭 화를 내며 맞대응을 했지만

방울토마토 사망 사건의 판결을 보니.

시험기간에 밥 많이 준 것도 죄라면 죄다.


그래, 내가 아주 죽을죄를 졌다.




브런치 구독자 여러분, 친정 아버지는 그렇다치고 아무리 생각해도 전 너무 억울합니다.

딸에게 밥을 많이 준 것도 정말 죄입니까?

상고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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