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역사 좋아하십니까?"
어느 지인의 질문이었다.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내 미국 역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그가 다시 물었다.
"작가님이 보시기에 세종대왕 시절의 백성들은 행복했을까요?"
생각지도 못한 돌발 질문에 머리 회로를 전력 가능하며 기억 속을 헤집었고 답을 내렸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 계속해서 전란과 혼돈이 끊임없이 펼쳐지던데요.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양반들도 많았고요."
미세하게 떨리는 내 음성에서 기회를 찾았는지 그가 다시 물었다.
"세종실록에서 현대 경영 해법을 찾은 분이 계세요. 그분을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아무리 복기를 해봐도 그가 펼친 화법에서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어렴풋이 알았던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었다.
Q.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1999년 ‘정조의 정치철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2001년부터 지금까지 24년간 세종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는 박현모 교수입니다. 현재 세종국가경영연구원에서 원장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광맥에서 리더십 콘텐츠를 발굴하여 퍼올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을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정조로 쓰면서부터였어요. 정조가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던 분이 세종대왕이었는데, 도대체 세종이 어떤 국왕이길래 똑똑한 정조마저 그렇게 높이 샀는지 궁금해졌죠. 그래서 세종실록을 되풀이해 읽어보니, 국가를 이끄는 과정에서 왕과 신하들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해 나가는 리더십 사례가 아주 많았어요.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소장, ⓒ알바트로스
제가 20여 년간 5,000회가 넘는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건 세종실록의 풍부한 내용 덕분이었죠. 실록에는 역사 속 인물들의 리더십 행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거든요. 그 속에서 배운 리더십의 지혜를 현대 경영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세종실록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지혜는 미래 리더에게도 길잡이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Q.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능했습니다. 기업 리더가 갖추어야 할 다재다능함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종은 "지도자라면 무소불통(無所不通), 즉 두루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강조했죠. 조직의 최고 책임자는 인재를 판단하는 안목, 국가 살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물론 미래를 내다보고 외교에도 밝아야 한다고 보았어요. 이를 위해 세종은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로 전문가들의 말에 귀 기울였죠. 세종실록에 보면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질문에 각 분야 최고의 지식을 연구해 국정회의에 도움을 주었어요. 리더의 다재다능함은 모든 분야에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전문가를 알아보는 식견(識見)에 있었죠.
문제해결 방식인 '세종다움'에서도 다재다능함이 드러납니다. 새로운 정책을 구상할 때는 가장 어려운 처지의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부터 살폈죠. 이어서 각계 인재들의 조언을 구하고,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에도 귀 기울였습니다. 단기적 효과가 아닌 장기적인 대안을 모색했는데, 이는 리더에게 힘든 길이었지만 결국 큰 성과로 이어졌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있어요. 세종 19년인 1437년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어요. 일 년 전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온 나라의 시내와 우물이 모두 말랐다고 해요. “봄에는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죽은 자가 많았으며,” 가족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는데, “쫓아오는 어린아이를 나무에 매어두고 도망치듯 떠나는 사람들까지” 있었어요. 이처럼 참혹한 상황을 보고 받은 세종이 보인 최초의 반응은 자기반성이었어요. 세종은 어전회의를 열어 “왕위에 있은 지가 20여 년인데 조금도 다스린 공효가 없고, 해마다 홍수와 가뭄으로 기근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이 모든 게 왕 자신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어요.
세종대왕 어진
하늘의 꾸짖음이 두렵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부디 자세히 얘기해달라고 당부했지요. 왕이 이처럼 자세를 낮추자 다양한 제안들이 어전회의로 흘러들어 왔어요. <농사직설>을 전국에 보내 첨단농법을 전파하자는 의견부터, 자기 고을의 곡식을 가뭄 든 지역으로 보낼 수 있다는 지방관의 보고, 그리고 출신 지역을 가리지 말고 찾아오는 기민들을 구휼하자는 제안 등이 그것입니다. 그 결과 “굶주려 죽게 된 사람들이 많이 되살아났으며, 날로 기운이 씩씩하여 거의 회복되었다”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올라왔어요.
손쉬운 결론, 금방 효과 거두는 대책이 아니라, 리더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래갈수록 더욱 큰 효과를 보이는 대책을 찾아내는 것이 세종다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Q. 세종시대는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는데, 이런 혁신 정신이 현대 기업 경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광화문과 여주 세종영릉 등 세종 유적지에는 혼천의, 앙부일구 등 당대의 과학 기구가 전시되어 있어요. 이는 다른 왕조와 구별되는 세종 치세의 특징이었죠.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과적 성과라 할 수 있어요. 아무리 과정이 모범적이었다 해도 성과가 부실하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죠.
이에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성과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어요. 일본 학자들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에 따르면, 세종 때의 과학기술 성과는 21건으로 당시 중국(4건)은 물론 유럽과 아랍 전체(19건)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해요.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던 것이죠.
가령 당시 노벨상이 있었다면 과학 분야에서 47%를 조선이 차지했을 거예요. 그 배경에는 창의적 분위기 조성과 고성과자에 대한 파격적 보상이 있었어요. 즉위 초부터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국정 방향을 문신들과 토의했는데, 생생지락(生生之樂), 즉 일터가 신바람 나는 나라 만들기를 비전으로 세웠죠. 또한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추천하고 발탁해 등용하는 ‘천거제도’를 적극 활용했으며,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 하여 ‘승진 차례에 얽매이지 않고 발탁하여 중용’했어요. 천민 출신 장영실을 종 3품 대호군에, 아전 이예를 종 2품 재상급에 발탁한 것이 그 예시입니다.
이처럼 세종 시대의 혁신 정신은 창의성 존중, 능력주의 인사, 고성과자 우대 등이었어요. 오늘날 기업 경영에도 이러한 정신이 필요해요. 단기 실적주의를 탈피하고 장기적 혁신과 창의성을 키우는 문화를 조성해야 해요.
Q. 역사적으로 세종대왕은 신하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업 내 수평적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시사하나요?
세종 치세의 찬란한 성과 이면에는 창의적 인재들의 자율성과 주인의식이 있었어요. 허조라는 신하는 죽음에 이르러서 ‘나는 평생 나라의 일을 내 소명으로 여겼다’고 회고할 정도로 국가 일에 몰두했죠. 비록 자신이 왕은 아니지만 맡은 일의 최종 책임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일했어요. 음악 분야의 박연, 북방영토개척의 주인공 김종서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의 자율성을 끌어낸 건 세종의 열린 소통 리더십이었어요.
조직 내 소통이 부재하면 구성원 간 시기심과 중상모략, 부서 간 불협화음이 발생하죠. 하지만 세종은 신하들과 활발히 소통하며 집단지성을 이끌어냈어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1433년 파저강 정벌이에요. 세종은 이 대규모 원정에 앞서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꼼꼼히 수렴했어요. 5개월여 동안 왕과 신하 간 수직적 의사소통뿐 아니라 신하 간 수평적 의사소통도 활발히 이뤄졌죠. 이를 통해 명나라 협조 문제, 전략전술, 시기 등 모든 부분을 세밀히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요.
결과는 압도적 성공이었어요. 파저강 정벌은 "대마도 정벌보다 그 공이 갑절이나 된다"며 세종 스스로 치하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죠. 이는 이후 4군 6진을 확립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충하는 계기가 되었죠.
이처럼 세종은 신하들과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집단지성을 끌어냈어요. 오늘날 기업도 수직적 지시전달에서 벗어나 수평적 의사소통 체계를 정착시켜야 해요. 구성원 모두의 아이디어와 역량을 결집할 때 혁신과 성장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Q. 세종 때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리더는 어떻게 위기에 대처해야 할까요?
세종 재위 8년인 1426년, 한양에서 발생한 '도성 대화재 사건'은 왕조 재난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였어요. 백성들이 조정의 화폐정책에 반발하여 궁궐이 비었을 때 방화 사건을 일으킨 것인데, 이는 세종에게 큰 충격이었죠. 실록에 따르면 도성 내 평범한 백성들이 사는 집 중 약 1/7인 2,170여 호가 전소되었고, 관청과 창고, 궁궐 건물들까지 화염에 휩싸였다고 해요. 이는 "한양에 국도를 세운 지 33년 만에 가장 큰 재난"으로 기록되었어요.
그런데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세종에게 배울 점이 있어요.
첫째, 위험 속에서도 기회를 읽어내는 통찰력이에요. 세종은 급히 한양으로 돌아와 우선 인명 구조에 총력을 다하게 했어요. 그리고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대책 마련을 위한 아이디어를 폭넓게 수렴했죠.
둘째, 위기 극복을 위한 과감한 제도 개선이에요. 세종은 화재 전담기구를 상설화하고, 화재 취약 지역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추진했어요. 그 결과 한양은 "기와집이 즐비한 도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죠.
셋째, 인재들의 아이디어에 힘을 실어주는 리더십이에요. 대책 마련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죠. 이는 신하와 백성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처럼 세종은 위기 상황에서 통찰력과 과감한 행동력, 그리고 집단지성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대응 자세와 방식에는 현대 경영자들이 되새겨야 할 통찰이 담겨 있어요.
세종대왕, ⓒ서울시 홈페이지
*본 포스팅은, 알바트로스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