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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Apr 04. 2024

매번 죽음을 담보로 자신을 대자연에 던지는 사람의 기록

최영규 시인의 '설산 아래에 서서'

"작가님, 이번에 꼭 뵙고 직접 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지난 몇 달간 꼭 한번 보자는 그의 요청에 마침내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반갑게 맞아주더니 내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지난번 말씀하셨던 시집인가요?"


그가 내게 그토록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시집이었다. 마지막으로 산 시집은 고등학교 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집이었다. 비즈니스 스토리텔러로 활동하기 전부터 경제경영 도서는 수백 권을 읽었지만 시집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산 아래에 서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은 설산의 절정에 우뚝 솟은 인간 실존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차갑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처절한 설산의 풍경이 시적 예리함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을 통해 눈부신 빛에 눈이 멀고, 손가락 끝이 꽁꽁 얼어붙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설사면에 튀긴 햇살이 칼끝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이튿날 아침부터 설맹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이어밴드로 눈을 덮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밴드 밑으론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뇌 속을 파고드는 통증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피켈을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마다엔 하얗게 고드름이 하나씩 달리고 나를 알아보기는 하지만 넋의 반은 누구에겐가 빼앗기고 온 것 같았다."


"한 동작의 실수면 수 백 미터 아래의 동빙하 계곡으로 날아가 버릴 설벽의 한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은 매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문한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가장 첨예한 실존을 맞이한다. 정상에 오른 저자는 말한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상에 풍경 따윈 없었다. 적막을 뒤집어쓴 허공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에세이가 아닌 시라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에베레스트 등반의 극한 체험을 전달한 작품이다. 작가는 문자 그 자체의 힘을 빌려 독자로 하여금 살아있는 현장감을 체험케 한다. 차가운 설산의 적막한 공기를 마시며 눈부신 빛에 눈이 멀고, 손가락 끝이 꽁꽁 얼어붙는 혹한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이 시집은 읽는 게 고통스러웠다. 정확하게는 추위와 허기에서 벗어나고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둔 펜스에서 서둘러 내려오고 싶었다.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비유컨대 이 시편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절대적 풍경의 아름다움과 처절함을 동시에 전하는 시선 그 자체이다. 단 한 치의 실수가 생명을 좌우하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작가는 겸허한 문체로 순간순간의 발자국을 소중히 새기고 있다. 이는 곧 삶 자체에 대한 경외와 사유가 담겨있음을 방증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한에 밀어붙이며 더욱 또렷하게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사람이야말로 평범한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감정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시집을 덮으며 언제가 나 또한 설산에 내 발자국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날을 상상해 본다.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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