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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May 19. 2020

"퇴사도 리콜이 되나요?"

신입사원, 퇴사를 번복하다.

*해당 글은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퇴사를 선포한 내게 국인 CFO가 회사에 남아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를 역제안하며 주말 동안 고려해보라고 했다. 당시 스위스 본사를 다녀온 직원은 회사의 황금기를 함께 한 연차가 높은 분들 외에는 많지 않았다. 당시 난 유럽을 가본 적도 없었고 비즈니스석을 이용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부수적인 제안으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CFO가 난 기가 막혔다. '어떻게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거지?'


원래 의 고민은 회사에 남을 것인가였다. 하지만 CFO의 제안으로 인해 '스위스 본사 교육을 위해 프로젝트를 감수할 것인가?'로 변되고 있었다. 가슴이 뛰는 일을 찾고자 퇴사를 결심했는데 내 가슴은 스위스로 인해 뛰고 있었다. '알프스? 눈 내리려나? 내복은 챙겨야 하나?' 지난 15개월간 직무에 대한 고민은 스위스에서의 의식주로 인한 고민으로 대체되었다. 콩밭을 넘어 콩국수집에 납품되었던 내 마음은 그렇게 모두 리콜되었다.


출처: Lukas Bieri from Pixabay


월요일이다. 출근하자 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부장님의 눈을 통해 아침인사가 전해졌다. 'OO 씨, 남을 거지? 우리 부서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 직원인데 오래가자.' 그의 그윽한 눈빛에 난 답을 했다. '이제 'OO 씨'가 아닌 주임으로 불러주세요.' 안도하는 그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배를 탄 동지을 확인했다.


이제 CFO를 만나 내 답을 전해야 한다. 긴 복도의 끝에 있는 그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감사함을 표하지만 너무 없어 보이지 않게. 겸손하지만 자신감 있게.' 그렇게 셀프 최면을 걸고 그와 대면했다.


출처: Karin Jordan from Pixabay


"So, did you take your time to consider the suggestion?"


제안에 대해 고민을 해봤냐는 그의 물음에 내가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와 쿨함을 모두 갈아 넣어 대답했다.


"If you insist, I am ready to take the position."


그렇게 CFO와 나의 딜은 성립되었다. CFO는 본인이 최대한 나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훗날 이 말의 뜻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퇴사를 하겠다고 들어간 임원의 방에서 스위스행 티켓과 조기 승진 보증서를 들고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사실 그 포지션은 CFO에게 보고하는 부서장들에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고 한다. 몇몇 분은 이미 다른 프로젝트로 바쁘셨고 몇몇은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CFO에게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담을 느껴 고사하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CFO는 인내심이 바닥나 폭탄선언을 했다.


"If there is no volunteer, I will have OO do it."


이 테이블에서 지원자가 없다면 나를 지정하겠다고 했다. 당시 부장님은 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사원이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반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CFO는 강고하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Either you do it or let OO do it."


출처: Lukas 님의 사진, Pexels


CFO는 부장님에게 직접 할게 아니라면 나를 담당으로 지정하겠다고 했다. 부장님도 어지간히 그 프로젝트가 부담스러웠는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부서장들이 부담스러했던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사원인 내가 적임자로 정해졌다고 한다. 당시, 나는 퇴사를 고민 중이었는데 당사자의 의중과 상관없이 나의 미래가 그 방에서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서로 떠넘기던 폭탄을 마지막에 내가 덥석 물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좋은 기회라며 건투를 빌어주었다. 사실 이게 폭탄이건 기회이건 남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원인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기회라는 것이 중요했고 폭탄일지라도 잘 다듬어 기회로 만들겠다는 신입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마도 수락 동시에 CFO 가 나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 이 때문이었나 보다. 앞서 이 포지션을 먼저 제안받았던 부서장들이 모두 프로젝트의 팀원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 연차가 적게는 7-8년 많게는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분들이 내 팀원이라니. 심지어 내가 속한 부서의 부서장도 팀원으로 배정해줬다. 당시 내가 속한 부서의 부장님은 다음과 같이 나를 위로했다.


"OO 씨가 여기 프로젝트에서는 리더이니깐 편하게 진행해."


출처: Andrea Piacquadio 님의 사진, Pexels


사실 부장님의 그런 말이 불편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의식 안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이 또한 부장님의 경륜에서 나온 지극히 의도적이며 고차원적인 심리전이 아닌가 싶었다. 예상치 못한 CFO의 서프라이즈 선물은 내게 큰 부담감을 안겨주었지만 몇 주 후 스위스행 비행기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떠하리. 회사의 위계질서 엉켜진들 어떠하리. 난 스위스에 가련다.' 


5월 어느 맑은 날, 드디어 스위스로 출국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수속을 마치고 탑승게이트에 이륙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했다. 이윽고 탑승을 시작하는데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 먼저 탑승하라고 한다. 후드티에 후줄근한 복장의 내가 앞으로 자신 있게 나서자 항공사 직원들이 움찔하며 말했다.


출처: t_watanabe from Pixabay


"탑승을 위해 티켓 확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비즈니스와 퍼스트 클래스 탑승을 먼저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 공항이 처음인가 본데. 아직 너의 순서는 오지 않았단다.)"


자격지심인지 말하지 않는 내용까지도 내 귀에 너무나도 청명하게 들리는 은사를 경험했다. 나는 굴하지 않고 티켓을 내밀었다.


"네. (우리 친구, 후줄근한 복장인 친구가 비즈니스석 타는 거 처음 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내 목구멍으로 다시 삼켜졌다. 그렇게 나의 첫 유럽 방문이자 해외출장은 시작되었다.


이후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재미없는 직장 얘기지만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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