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뻐요

by 노엘

바람이 분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노랫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왜 이렇게도 새삼스레 들려오는지, 조금만 틈이 나도 마음은 어려워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처음 겪는 계절도 아닌데 모든 것이 처음 같았다.


촬영 답사를 가는 길에 우연히 인사동 뒷길에서부터 혜화동을 지나게 됐다. 셀 수도 없이 걸었던 거리였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풍광이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나의 20대는 대부분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서로 울거나 웃거나 온통 그런 날들뿐이었다.


주변의 상점들은 조금씩 변했지만, 우리가 걸었던 그 길들 만큼은 그날 그대로였다. 예쁜 빛이 내려앉은 거리엔 얼굴을 가린 사람들마저 기분 좋아 보였다.


걷다가 기분이 내키면 창경궁에 들르곤 했다. 너무 크지 않고, 너무 멀지 않고, 언제 와도 편안한 공원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도 일 년에 한 번은(너무 서운한 숫자이지만) 꼭 챙겨 가려고 하고 있다.


오늘은 아침이 빨랐다. 지난 검진의 중간 검진 날이었고, 혈액 검사 때문에 7시에 세브란스에 도착해야만 했다. 진료시간은 9시부터라 중간의 두 시간 동안은 스튜디오까지 겸사겸사 걷다가 오면 될 것 같아서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본 백양로는 어느새 공사가 모두 끝난 모습이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시기에 들어온 신입생들은 이 예쁜 길을 못 걷겠구나 싶었는데, 시간은 금세 흘러버렸고, 새순 같았던 나무들도 제법 자라서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이 길을 걸었던 건 조금은 오래 전의 일인데, 백양로 뒤쪽에 있는 마법의 성(이라 불리던) 경영학부 쪽에서 수업을 듣던 당시의 여자 친구 덕분에 익숙한 길이 됐다. 그때는 내가 서대문구에 살게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기였지만, 어쩌다 보니 이젠 제2의 고향 비슷한 곳이 되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홍광호 씨가 부른 [참 예뻐요]가 흘러나왔다. "짧게 웃고 길게 우는 사랑 준 사람" 가사가 너무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큰 한숨만 내쉬었다.


달은 반쯤 차올라 있었고,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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