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고, 온몸에 잠버릇을 두른 채로 집을 나서는 날이 반복됐다. 속이 불편해서 신경이 곤두선 사람처럼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을 가장 처음 시작하던 때처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약간의 틈이 생겨 재정비를 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10월의 중순에 가까운 날짜가 됐다. 더는 반팔 차림으로는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는 기온이 됐고,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아직 일들이 전부 지나간 것은 아니다. 아마도 1/3 정도 지나왔다. 대부분의 촬영이 그렇듯 시작점은 무엇보다 중요해서, 그 가장 첫 중심을 잡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말하기 시작하면 단편 소설 정도의 길이는 나오지만 아무튼 빌런은 물리쳤고, 촬영은 계속됐다. 카메라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목에서 핑크 뮬리를 심어 놓은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자체는 눈에 익숙한 곳이었지만 정원을 새로 꾸민 모양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꽃과 식물은 오랜 냉전의 나날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을 설레게 만들어 준다.
술을 마시고 한 시간 정도 전화를 했다. 희미한 조각들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말하는 나의 일본어는 괜찮았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쉽게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솔직한 많은 말들을 할 수 있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일은 지나고 나면 부끄러워진다.
슬슬 10월의 2/3를 향해 가야 한다. 힘 내보자 내 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