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계절

by 노엘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는 일들도 있었네요.”


“아직도 처음일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좋은 일이에요.”


그 여자아이를 다시 만난 건 햇수로 12년 만의 일이었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특별히 교류라고 할만한 일은 거의 없었고, 우리가 만난 건 오래전 여름날의 단 하루뿐이었다. 그마저도 단 둘이 아닌 여러 사람이 뒤섞인 가운데에서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DM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위로의 메시지가 날아들었고, 왠지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SNS를 통해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희미하게 있었다. 물론 그랬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똑같은 모습으로 짙은 갈색 코트를 입고 회색 헤드폰을 쓴 채 역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한눈에 발견했다.


처음 만났던 모습은 여름이었는데, 다시 만난 건 몇 번이나 계절이 지난겨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린 생각보다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쉼 없이 달려오던 여자아이는 어쩌면 더는 여자아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백여 명을 관리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었고, 지금은 회사의 배려로 안식년을 가지고 있었다.


둘 사이에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왠지 오래전 만났던 연인과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지금은 누구도 만날 수 없어서,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유일하게 그날들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기에 과거의 나를 불러와 자리에 앉혀 놓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앞에 앉아 조근조근 상냥한 말투로 말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은 왠지 오래된 흑백 무성 영화를 재생시켜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수년간 두 배 속으로 흐르던 시간이 그제야 멈춰 서서,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오래전의 일을 사과했다.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작은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스스로를 온전히 지탱하고만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었어요."


애달프고 따뜻한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에서 젖은 봄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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