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5월

by 노엘

우연한 호기심으로 옛날에 쓴 일기를 들춰 보게 됐다. 옛날이라고 해봤자 불과 4~5년 전의 이야기다.

그때의 부끄러웠던 자신의 조각을 훔쳐보며 지금 왜 이곳에 와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너무나 고독했다. 메말라 갈라진 땅 위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뿌리를 반쯤 내민 채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못 본 척 나무를 지나쳤고, 안타까운 듯 이따금 조금씩 물을 나누어 주긴 했지만, 순간뿐이었다. 모든 것이 메마른 대지는 산이 호수가 되는 정도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더 먼 곳의 꿈과 사랑을 갈구했다. 대부분은 나의 이런 갈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를 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쉽게 비평의 말을 쏟아냈다.


많은 관계는 쉽게 끝이 났다. 짧은 안녕의 인사 하나로도, 쌓인 시간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영원히 멀어졌다.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은 매 계절이 변해가며 서서히 잊혀갔다. 처음에 아팠던 가슴의 통증도 이제는 희미한 새벽의 안개처럼 금세 사라졌다.


처음 혼자 살던 집에 이런저런 생필품을 두고 간 여자아이가 있었다. 대부분은 버렸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두고 간 면봉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거의 새것이었다. 200개가 들어있던 것에서 아마 열 개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면봉을 다 사용할 때쯤이면 아마도 나는 이 아이를 잊게 되지 않을까. 하고, 한 달에 한 번도 면봉을 사용하지 않을 때가 많았던 나에게 200개에 가까운 숫자는 영원과도 같았다.


처음 살던 집에서 두 차례 이사하였을 때에도 이삿짐과 함께 이동했고, 결국 마지막으로 서울에 살던 집에 다다라서야 그 면봉을 모두 소진하게 됐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무한대처럼 보였던 케이스가 조금씩 빈틈을 보이게 되고, 마지막 남은 한두 개째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나, 마지막 면봉을 꺼내면서 다시 한번 그 아이를 생각했다. 이제는 오래된 사진처럼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면봉을 사본 적 없었던 나는 곧바로 새 면봉을 한 통 주문했고, 짐을 정리하면서 미련 없이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실 최근의 매일은 불안할 정도로 평화롭다. 때가 되면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해 요리를 만들고, 하고 싶었던 일은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기분도 든다. 어떤 촬영이 결정되었을 때는 마치 처음 일을 시작하던 때처럼 뛸 듯이 기쁘기도 했다.


카나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콧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새 5월이 되었고, 비가 내린 뒤 집 앞의 공원은 연두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바람에선 달콤한 풀 냄새가 났고, 그리운 것보다는 앞으로의 것들을 조금은 더 기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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