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과 메리 크리스마스

by 노엘

아마도 유치원을 다닐 정도의 나이였던 것 같다. 그 무렵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늘 창문을 열고 바깥의 풍경을 확인하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렸고, 항상 그렇게 생일을 맞았다.


모든 손가락을 다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 다음날 아침의 날씨 같은 건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침에 창문을 여는 기대감은 여전히 조금 남아있다. 어쩌면 바깥 풍경이 새하얗게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는, 마치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그렇게 머리맡 한편에 조용히 내려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다.


나는 그토록 바라던 사진가가 됐다. 그리고 올해로 10년이 됐다. 사실 10년이 될 때 즈음이면 나는 더 무언가 그럴듯한 결과를 내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지만, 이런 기대감은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서른 살이 되면 그럴듯한 모양을 한 삶을 살 것만 같은 어렴풋한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에서 오늘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시간에 쫓겨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그저 큰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일을 시작하며 자취를 시작했을 때 집 근처엔 간판도 없는 작은 바가 하나 있었다. 테이블은 고작해야 4개 정도 놓여 있었고, 다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이 하나 달린 직사각형 형태의 작고 좁은 곳이었다. 서둘러 걸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마스터가 있었고, 테이블이 가득 차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둡고 작은 공간에 미러볼이 초침처럼 끝없이 맴돌았고, 나는 늘 바에 앉아서 가장 싼 산미구엘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다.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던 나에겐 돈이란 건 조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위로받을 수 있는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들르던 그곳은 나의 사랑과 꿈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마음 둘 곳 없었던 초라한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많은 말을 할 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장소였다.


"이곳엔 규태 씨처럼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에요." 어느 날 마스터가 말했다. 웃고 넘어갔던 한 마디가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그러다 일이 바빠져서 한동안 자주 들르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마스터가 말했다. "오늘이 우리 가게 영업 마지막 날이에요." 그의 말에선 슬픔이나 아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지금은 밤 열 한시 십 분이에요,라고 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래도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직접 전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로선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예고대로 다음날부터 그 장소는 미러볼이 꺼진 채 한동안 멈춰 있었고, 볼품없는 모양새의 술집들이 들어와 몇 번이나 간판과 모양이 바뀌는 걸 반복했다.


그 이후에 다시 한번 이런 장소를 찾고 싶어서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꿈과 사랑을 한가득 털어놓은 위로와 휴식 같은 공간과 이별하게 됐다. 그리고 그 간판도 없었던 바의 이름이 [세상의 끝]이다.


그날 이후부터 줄곧 생각했다. 반드시 내가 "세상의 끝"을 다시 만들고 말겠다고. 간판에는 studio HARU라고 쓰여있지만 사실 서류상의 숨겨진 진짜 이름은 세상의 끝이다. 그렇게 지금의 공간들이 만들어졌고, 어딜 가나 가장 처음 반겨주는 미러볼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형태는 다르지만 더 이상 어느 곳에도 갈 곳 없었던 내가 머물렀던 세상의 끝에서 보다 많은 것들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다 하지 못했던 꿈과 사랑도 모두 담아내고 싶다.


어린 시절 어렴풋이 꿈꾸던 모습들이 조금씩 형태를 만들어 비칠 때가 있고, 그야말로 꿈을 꾸는 것 같은 순간들이다. 모두 함께 해주신 분들 덕분이다. 올해는 유난히 고요한 날이지만, 그럼에도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저는 늘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 큰 어른이라 이미 알고는 있지만이제 슬슬 창문을 열어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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