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리뷰
사랑이 병이라면 그 병을 앓다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삶에 사랑 그것 하나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은 걸 변화시킨다. 그건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궁금했다. 상처받은 이들,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의 사랑을 다룬 수많은 소설 중에서 감독은 왜 권여선 작가의 ‘봄밤’을 선택했을까? 아는 작가에게 그 소설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단순 명료했다. “절절해.” 그래 그것이었다. 절절함. 특히, 걸을 수 없게 된 수환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영경을 엎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에서 그 절절함은 극에 다다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오직 사랑만이 남아서 그 사랑이 더욱 애틋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사랑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사랑은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자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이용되고 있다. 이번 영화제 내내 봐야만 하는 샤넬의 노골적인(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상품) 광고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 애쓰고, 그 사랑을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진정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사랑으로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인해 사랑이 변하는 것일 뿐. 그래서 <봄밤>은 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아서 더 애처롭다. 수환과 영경이 앓고 있는 질병은 사랑으로 극복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결국 마지막엔 사랑만 남는다. 그게 누군가를 위한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일 처음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다른 이들은 모두 죽은 듯이 술상에 엎어져 있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영경과 그걸 지켜보는 수환만 있듯,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이고, 그 외에는 누구도 중요하지 않다. 술에 취한 영경을 향해 기어갈 때 역시 두 사람만 보인다. 사랑이 뭔가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인 이들이기 때문에 사랑이 더욱 절절해진다. 오직 남은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술에 취한 영경이 수환의 등에 업혀 반복하는 김수영의 ‘봄밤’. 소설은 장면을 반복하지도 않고 구절을 반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는 소설보다는 시를 닮아 보인다. 소설이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따른다면 시는 비약과 반복으로 감정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영화는 자주 반복되고, 어느 순간 결말에 다다른다. 한 편의 시를 읽었고, 다시 첫 구절을 반복해서 읽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