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복실복실
To; 다시 만난 행운에게
안녕, 다시 만난 행운아?
오늘 여기는 날씨가 무척 좋았어. 그래서 이번에는 보드라운 산들바람들에게 행선지를 물어가며
너의 향기가 나는 쪽으로 가는 바람에게 이 편지를 맡길 수 있었단다. 너에게 무사히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
이번 주에도 몇 번이나 무심코 너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랑은 단 한 번의 대화밖에 안 해보았지만
나에게는 벌써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어버렸나 봐.
하지만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미주알고주알 모든 이야기보따리를 넘겨주기는 쉽지 않은 일이야.
그 어떠한 가벼운 말이 뭉쳐서 생긴 이야기보따리라도 듣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 저울’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마냥 가벼웠던 이야기보따리가 누군가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으니까 무척 조심해야 하거든.
이해가 잘 되진 않지만 너희 인간들은 ‘이야기’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
우리 요정 세계에서는 ‘이야기의 무거움’으로 다른 요정들을 짓눌러 버리거나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우리 세계의 법에서는 아주아주 무거운 범죄 행위로 간주하거든.
아마 너희는 그 무게가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짊어지고 있는 거대한 무게의 짐에 어울리기는커녕 가벼운 날개만 돋아나야 할 듯한 여린 그 뒷모습에
얼마나 많고, 무거운 것들이 너희를 짓누르고 있는지 말이야.
가끔 내가 맡은 인간이랑 생활할 때, 자신의 편의를 위해 다른 친구 어깨에 이야기 꾸러미를 더 올려놓는 다른 인간들을 보면 정말로 너무 얄미워서 내가 몰래 그들이 잘 때 내가 가진 가장 뾰족하고 날카로운 털로 그들의 콧속이나 귓속을 괴롭히고 온 것이 몇 번인지 몰라. (이건 다른 요정들한테는 비밀이야!)
'듣는다’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나의 관심의 행위이자, 배려, 더 나아가서는 애정을 보이는 모습인데 왜 나에게 그러한 매끄러운 부드러움을 보이는 이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아.
너도 그렇지?
하지만, 이 세상은 네발로 걷는 이에게도, 두 발로 걷는 이에게도, 심지어 우리처럼 날개를 가진 이들에게도 완벽한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번 주에 곰곰이 생각해 본 아이디어가 있는데… 들어줄래?
우리 모두 엄청 엄청 말도 되지 않게, 크고 거대하게 ‘복실’ 해지는 거야.
내가 다른 요정 친구들이랑 상의를 해보았는데, 만약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양들의 털을 합치고, 가장 빽빽한 구름들만을 모아 실을 지어 우리가 두르고 다닌다면,
우리 위에 어떠한 이야기의 무게가 던져져도 그 무게가 안 느껴지지 않을까?
느낄 수 없고 그 무거움이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무게는커녕 서로의 무게를 대신 들어주며 서로의 바보 같은 모습에 더욱 웃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더욱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니?
내가 이 아이디어를 우리 숲 속 요정들과 네발 친구들한테 말할 때, 모두 내 말에 시큰둥해 보였어. 우리 숲에서 가장 젠틀맨으로 알려진 생쥐 Mr. 안단테까지
“흠… 그것은 조금 비현실적인 이야기군요,
먼지 군! 구름을 채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그리고, 그만큼 복실 한 털들을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어떻게 선물하겠어요!”
라면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은 듯했거든.
그런데 그 이후 어느새인가, 숲 속 모든 식구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짠 ‘구름채’를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구름을 열심히 따고 다니는 게 아니겠어?
구름을 따려면 일단 바람들이 구름을 자주 모으는 길목에 숨어 그들이 숨은 곳까지 올 때쯤 아주아주 높이 뛰어야 해, 하지만 요정들이 강한 바람에 휩싸이지 않고 정확한 타이밍에 뛰어올라 구름을 딴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라 날마다 성과가 있는 일은 아니지. 그럼에도, 날 수 있는 요정들은 수만 킬로를 날아 헐떡이면서, 그렇지 못한 요정들은 자신의 몸보다 큰 트램펄린을 가져다 놓고 그 위를 방방 계속해서 뛰면서도,
자신의 담당 인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복실 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보이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내려놓지 못하고 지고 있는 그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다면, 그 작은 가능성이 요즘 우리 요정들을 아주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
어휴 나 좀 봐! 너무 나만 내 이야기를 떠들었다.
최근에 너를 담당하는 요정한테서 너의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
그 친구는 너의 가볍고 얇아 보이는 어깨에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다고 아주 걱정투성이야.
마지막으로 그 친구가 보여준 너의 사진에 의하면 너의 몸이 그리 가냘파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물론 농담이야)
네가 들고 있는 짐들이 오롯이 네가 벗어던져버리고 싶은 것들만은 아닐 거야.
그중에는 분명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걱정’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와 같은 너의 중심을 찾아주는 무게들도 있을 테니까.
그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너를 멋있고, 대단하게 생각해 나는. 정말, 정말로 이보다 더 잘 해낼 수는 없을 거야
그럼에도
언젠가 그 무게도 너를 떠날 때가 분명히 있을 거야.
질문에 해답을 찾든, 아니면 너의 마음의 힘이 점점 강해져서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워지든
점점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는 것만은
내가 나의 모든 마법을 걸고 약속할게.
잘 있어!
멋있는 친구
추신; 다음 주부터는 몸이 한결 가벼워질 거야. 내가 너의 담당 요정을 도와 빽빽한 구름 한 아름을 채집하는 기적을 이루었거든! 기대하라고!
From; 나날이 복실 해져 가는
너의 팬, 먼지 요정이
숲 속 최고의 포토그래퍼 쿼카가 찍은, 요정들과 동물들이 채집하고 있는 복실 한 구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