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

- 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

by 최용수

♡ 다리오 마리아넬리(Dario Marianell, 1963~ )

< 영화『오만과 편견』OST 중 '새벽' / 'Dawn' from Movie『Pride and Prejudice』OST>


https://youtu.be/nc_5XL6ae4I?si=BK69FkWC_k6hwrZs


이른 새벽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새벽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영화 <오만과 편견> OST 중 '새벽(dawn)'을 틀었다. 이 곡과 연결된 다른 수록곡들이 27년 전 아내와의 연애 순간부터 결혼 이후 지금까지의 행복한 기억들을 되살려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60년 전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나를 낳으셨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의 시작은 그렇게 '사랑'이었다.


사랑이 싹트고 자라는 과정은 각자 다른 시간의 세계를 살아온 연인들이 마음속 '오만'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이 영화는 꼭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클래식 음악일기를 써 온 지 이제 2년이 넘어간다.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간 밤의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집을 나와선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 들을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일상의 축복 같은 일이었는가?

그리고, 그걸 2년 넘게 아침의 일상적인 루틴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삶이 안정적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아침의 루틴을 깰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일들도 있었지만, 내 일상의 틀을 깨버린 갑작스러운 일들은 마치 오뚜기가 무거운 무게추의 힘으로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바로 다시 중심을 잡아가는 것처럼 내 안정적인 일상이 묵직하게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아침의 루틴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의 안정성을 지탱해 오던 가족 관계가 작년에 비해 너무 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사별...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어머니 지병과 잦은 병고, 그리고 장인어른의 깊어진 병환... 마치 평온하던 섬으로 사나운 태풍이 몰아닥친 것처럼 쉬지 않고 밀려오는 거센 바람과 파도에 본가와 처가 모두 일상의 안온함이 사라져 버렸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자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양해야 할 누군가가 생겼다는 의미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자식을 얻고 나서도 내가 누군가를 부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건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양가의 부모님까지 내가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 자신들의 영역에서 성공적인 삶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이제 차분하게 내가 살아온 삶의 속도를 늦추고 그동안 빠른 속도감에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던 책임들에 대해 되짚어볼 때가 되었다. 4년 뒤 정년까지를 고려해서 삶을 좀 더 단순하게, 건강까지를 고려해서 일과 관심분야를 좁히고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올해 6월부터 매일 아침 카톡 메시지로 공유해 오던 '클래식 음악일기'를 브런치스토리로 옮겨 전달하기 시작한 지 3달이 되어가는데, 아쉽게도 브런치 북의 매일 연재는 이제 매주 연재로 바꾸기로 했다. 브런치 북을 중단할까도 생각했지만 정년 이후 다시 일상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 다시 매일 연재도 가능할지 몰라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은 남겨두려고 한다. 오늘 쓰고 있는 이 글은 세 번째 브런치북의 28회 차가 될 것인데, 내일 금요일 29회 차, 다음 주 월요일 30회 차를 끝으로 세 번째 브런치 북이 끝나면, 그 주 일요일부터 네 번째 브런치북은 매주 일요일 연재로 바꿀 예정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매일 읽어주시고 공감과 격려를 전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내레이션처럼 흐르던 음악


2005년에 발표된 영화 『오만과 편견』은 조 라이트 감독의 섬세한 원작의 해석과 인간의 감정을 세심하게 담아낸 영상미, 그리고 OST를 맡은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음악적 언어가 아름답고 조화롭게 어울려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서, 인물의 내면과 장면의 정서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내레이션의 역할도 담당한다. 특히 영화의 첫머리, 잔잔한 안갯속 긴 새벽 산책 장면과 함께 흐르는〈Dawn〉은 우리들에게 잊고 있던 오래된 자연에 대한 본능을 일깨운다. 음악은 스크린 속 영국 시골의 정경을 넘어서, 엘리자베스의 내면, 미묘한 시대정신, 그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자아의 떨림까지 오롯이 옮겨 놓는다.



이 영화의 첫 번째 OST〈Dawn〉은 엘리자베스가 책을 읽으면서 집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와 안개 낀 들판을 산책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곡은 이어지는 여러 장면, 예컨대 피아노 연주가 배경이 되는 실내 장면이나 다아시 저택의 아침 정경 등에서도 변주되어 흘러나온다. 음악은 새벽 특유의 조용한 감정과 희망, 그리고 아직 밝아오지 않은 하늘에 깃든 꿈의 기운을 표현한다. 피아노의 인트로가 섬세하게 퍼지며, 현악기들은 서서히 색채를 더해간다. 장조와 단조의 교차는 현실과 이상, 두 세계 사이에 선 주인공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표현의 절제와 동시에 담백한 서정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 한켠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공명을 불러낸다.


이 곡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미니멀리즘과 서정성의 절묘한 융합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피아노의 단순한 아르페지오 위에, 현악기의 미묘한 페달링과 잔향, 그리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목관악기의 선율. 화성의 진행은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 낭만을 품고 있으며, 리듬의 흐름은 자연풍경의 순환, 혹은 미묘한 정서의 파동을 그려낸다. 평론가들은 ‘Dawn’이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의 자유로운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한 인생의 아침처럼 설렘과 고요를 동반한다고 평가한다. 이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장-이브 티보데(Jean-Yves Thibaudet)의 감성적인 해석 또한 빼어났는데, "마치 시간조차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인 순간들에 서정과 포용을 불어넣는다"는 평론가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작곡가 다리오 마리아넬리는...


다리오 마리아넬리는 1963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들 모두 음악을 사랑하고 즐겼던 분들이어서 다리오의 어린 시절 집안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고 한다. 6세 때부터 피아노 연주와 소년합창단에서 노래를 시작한 다리오는, 8년 동안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피사에는 음악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개인 교습으로 피아노를 배우며 인근 도시인 플로렌스, 루카, 리보르노의 음악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 시기 플로렌스에 거주하던 괴짜 미국인 데이비드 킴볼(David Kimball)을 만나 7년 동안 대위법을 중심으로 작곡을 배운 것은 다리오의 중요한 음악적 토대가 되었다. 이외에도 다리오는 슬라이드 휘슬과 멜로디 호른을 익혔으며, 이후 자신의 작품에 이런 악기들을 창의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렇게 음악적 기초를 다진 마리아넬리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의 명문 길드홀 음악드라마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 and Drama)에서 작곡 전공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친다. 이어서 그는 국립영화텔레비전학교(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에서 3년을 더 보내며 영화음악에 대한 전문적 기법을 습득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경력은 무보수 프린지 연극음악 작업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곧 콘서트 작품, 발레, 연극 제작의 의뢰로 이어졌다. 1994년 패디 브레스나치(Paddy Breathnach) 감독의 영화 《Ailsa》로 첫 장편영화 음악을 맡게 된 마리아넬리는, 이후 《I Went Down》(1997), 《Pandaemonium》(2000), 《The Brothers Grimm》(2005)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조 라이트 감독과의 운명적 만남


다리오 마리아넬리와 조 라이트 감독의 인연은 2001년 폴 웹스터(Paul Webster)를 통해 이어졌다. 웹스터는 이전에 다리오 마리아넬리와 작업한 경험이 있었고, 젊은 감독 조 라이트가 새로운 시각으로 제인 오스틴을 각색하려는 계획을 듣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다. 2005년 《오만과 편견》에서의 첫 협업은 즉시 예술적 교감을 보여주었는데, 라이트 감독의 시각적 서정성과 마리아넬리의 음악적 감수성은 완벽하게 서로를 빛나게 해 주었다. 이 작품으로 마리아넬리는 아카데미상 작곡상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어톤먼트》(2007), 《안나 카레니나》(2012), 《다키스트 아워》(2017)로 이어지며, 라이트의 '시대적 서사'와 마리아넬리의 '정서적 음향'이 하나의 예술 언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마리아넬리를 "내 영화의 감정적 심장박동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라며 그의 음악적 페르소나라고 여겼으며, 마리아넬리 역시 라이트의 영상 언어가 자신의 음악적 상상력을 항상 자극한다며 그의 영상연출을 높이 샀다. 특히 《오만과 편견》에서 두 사람은 '고전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감수성의 융합'이라는 공통된 미학을 추구했는데, 라이트의 자연스럽고 친밀한 카메라 워크는 마리아넬리의 실내악적 섬세함과 조화를 이루며, 화려한 스펙터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두 작가의 성향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들의 협업 과정에서 마리아넬리는 단순히 완성된 영상에 음악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각본 단계부터 참여하여 음악적 모티프를 영상의 리듬과 함께 맞추는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각 트랙의 장면별 음악 효과와 미학적(?) 해석


영화 오만과 편견 OST의 음악은 매 장면마다 시대적 정취와 인물의 심리를 촘촘하게 반영한다. 다리오 마리아넬리는 18세기말 영국의 농촌 마을을 그린 제인 오스틴 원작에 어울리는 고전적 서정과 현장감을 의도적으로 융합하였다. 특히 조 라이트 감독과의 긴밀한 예술적 소통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춤, 실내악, 바로크 음악(비발디, 퍼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 영감을 받아 피아노, 현악 3~4중주, 하프시코드, 플루트 등 소규모 편성으로 정교한 질감을 그려낸다. 이 음악은 관객이 마치 그 공간과 인물 안에 직접 들어가 있는 듯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트랙별 구체적 장면 예시와 효과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Dawn〉은 오프닝의 새벽 들판 장면을 관통하며, 관조적이면서 기상하는 심상, 희망의 기운을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화로 자아낸다.

〈Stars and Butterflies〉는 깨어나는 자연과 가족의 아침 일상을 형상화하며, 흩어지는 피아노 라인과 높은 현악 주법이 경쾌하다.

〈The Living Sculptures of Pemberly〉는 펨벌리 저택의 아름다움, 낯선 경외심,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내면 변화가 섬세한 아르페지오 스트링 위에 그려진다.

〈Meryton Townhall〉과 〈The Militia Marches In〉은 마을의 축제와 사교 장면에 고전 무곡의 스텝감과 궁정풍 리듬, 'The British Grenadiers' 같은 전통 군대 행진곡이 변주되어 삽입된다.

〈Georgiana〉는 다아시의 여동생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수한 순간을 맑은 소리와 단조 진행으로 상징한다.

〈A Postcard to Henry Purcell〉은 실제 헨리 퍼셀의 작품을 차용하고 변주하여 18세기 바로크적 분위기와 현대 감성의 융합을 노린다.

〈Liz on Top of the World〉에서는 언덕 위 엘리자베스의 심화된 내면, 자유, 주체성 등의 감정을 피아노 솔로와 스트링의 겹침으로 매우 서정적으로 풀어낸다.

〈Darcy’s Letter〉는 서사적 전환점이자 클라이맥스가 되는 장면에서 반음계적 진행과 긴장감, 억눌린 감정을 음악적으로 묘사한다.

〈Your Hands Are Cold〉는 결정적 고백과 프러포즈가 교차하는 명장면을 피아노와 현악기의 고조된 화음으로 극적으로 포장하며, 정서적 해방의 미학을 전달한다.

〈Mrs. Darcy〉는 해피엔딩을 축복하는 부드럽고 소박한 멜로디, 절제와 평화의 감정을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유지한다.


이 곡들을 맡아 연주한 장-이브 티보데의 피아노는 여성 인물, 특히 엘리자베스의 말없는 내적 독백, 변화와 성장의 궤적을 충실하게 대변해 준다. 감상자는 각 트랙마다 인물의 시점, 혹은 감정의 이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 마침 친절하게도 유튜브에서 OST 전곡을 감상할 수 있는 링크를 제공하고 있어서 소개한다.

- https://youtu.be/eAgQlpSRub0?si=Jp08EqYHiiwb55i9



♥ 속도

- 유자효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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