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tter from Paris
7년 만에 파리에 돌아왔다.
성벽 같은 거대한 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자그마한 민박집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이층 침대 옆 집채만 한 캐리어를 세웠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지갑을 들고 뛰쳐나간 동네의 골목 어귀에서 맡은 익숙한 향기, 역시 파리엔 빵집이지. 갓 구워낸 빵이 아닐 텐데 구수한 곡물의 향이 온 골목을 채워낸다. 1유로 안팎이면 받아오는 팔뚝만 한 빵. 대체로 받아 들자마자 한쪽 끝을 툭툭 분질러 입 안에 넣기 바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쫄깃한 이 맛. 바게트. 지난 두어 달을 이 빵과 씨름했었다. 제대로 구워 낸 빵 맛의 차이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음식은 간접경험으로 전달하는데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자신이 먹어보지 못한 맛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두어 달 우리를 빵과 씨름하게 했던 곳은 한국에서 유럽식 식사빵을 구워내는 곳으로 알려진 폴앤폴리나.
베이커리 10년 차, 10년 동안 같은 빵만 구워 팔았다.
계절이 바뀌고 햇수가 달라져도 파는 빵의 메뉴는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처음 먹었던 빵을 그대로 만드시는 걸까. 베이커의 엄청난 의지와 자부심이 놀라웠다. 그런데, 실은 매년 빵을 굽는 방법이 바뀌고, 꾸준하게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베이커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작년 치아바타보다 올 해의 치아바타가 더 소화가 쉬워졌다던가, 쓰는 밀가루가 더 좋아졌다던가.
만드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차이를 10년간 더해서 지금의 빵이 완성된 셈이다. 그에게 베이커리는 10년째 가오픈 상태라고. 이제 10년 구웠는데, 완성형의 베이커리가 되려면 아직도 최소한 20년은 더 해야 한단다.
연희동 본점은 실은 베이커의 집이기도 하다. 1층 한쪽 구석에 빵집을 열고, 2층에서 살고 있다. 폴앤 폴리나에게 카페는 멀고도 가까운 기억이랄까. 10년 전 처음 홍대입구에 빵집을 만들었을 때, 시작이 베이커리 카페였단다. 커피도 내리고, 빵도 팔고 샌드위치도 내고 베이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 풍경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손님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기보다 드릴 빵에 집중하게 되면서 결국 take out 전문 빵집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사실 폴앤폴리나의 판매 공간은 전체면적의 1/4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좁은 곳에서 넉넉하게 잘라주시는 시식 빵을 입에 물고, 카운터 너머 베이커들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학생 시절에는 산 빵보다 시식을 더 많이 했던 기억도 있을 만큼, 베이커의 시식 인심은 아주 후한 편이다. 직접 주차관리까지 하다 보니, 대부분의 손님들은 베이커를 몰라보기 일쑤다. 친절한 주차 아저씨의 타이틀을 달고, 한 발 떨어져서 계속 고민해 왔다. 심지어 지방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할 자리가 없는 아쉬움 때문에. 1년의 고심 끝에 결국 이렇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처음엔 카페 내부의 심플하고 과감한 공간 구성에 놀랐다. 큼직한 나무 테이블과 거친 느낌의 조명에 베이커의 취향이 담긴 가구가 놓이고 보니, 아늑하고 캐주얼한 누군가의 거실이 되었다. 입구에는 홍대입구에 10년 전 처음 달았던 간판을 다시 달고, 그의 집 안을 장식하던 그림들이 놓이니 딱 주인을 닮은 공간이다.
건너편에 앉은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만의 아지트'를 찾았다고도 했다.
늦게 일어난 주말, 굳이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고 들러 샌드위치 하나 먹고 갈 수 있는 쉼터. 추운 날 푸근한 소파에 앉아 갓 나온 빵과 함께 커피 한잔 하고 싶을 때나 근처에서 친구를 기다려야 할 때. 이 곳을 들러야 할 이유는 일일이 꼽자면 수도 없이 많으니까. 너무 유명해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마저 들곤 한다. 내게도 우리 동네에 이상적인 거실이 하나 생길 모양이었다. 정말 우리 집 거실처럼 착각하게 생겼다.
처음 폴앤폴리나와 이웃이 되던 날, 신기한 기분이었다. 지난 수년간 홍대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그 빵집의 사장님과 알게 되다니.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아도, 만드시는 빵에 대해서는 지금껏 더 나은 빵을 먹어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곳이었기에, 살짝 감격스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그들의 빵으로 프렌치토스트 해본 적 있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먹기도 아까운 빵으로 프렌치토스트라니. 대부분의 고객분들이 같은 반응이란다. 식사로 먹을 수 있는 빵을 굽기 때문에, 무엇인가 곁들여 먹는 것이 더 좋은 빵이라고 십 년째 설명드려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리 쌀밥이 맛있어도 언제까지 맨밥만 먹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특히 인공 계량제를 쓰지 않는 이들의 빵이 보관에 강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먹고 남은 빵을 냉동실에 얼렸다가 해동해도, 갓 구운 빵의 얼추 80%는 복원이 된다고. 그런데, 대체로 나도 이들의 빵을 얼려본 적이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자리에서 봉지를 열면 그대로 다 먹어치우기에도 모자란 맛이기에.
베이커의 말대로 한 번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일부러 전날 구운 그의 바게트를 계란물에 담가 토스트로 구웠다. 그리고 그 위에 산딸기 잼을 크게 한 숟가락 올려 보았다. 아... 이렇게 먹어야 하는구나. 그가 그토록 고집을 부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꼭 소중한 사람들에게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면, 보이는 풍경이 바뀐다. 지난 두 달 이후로 파리의 모든 골목에서 빵집이 제일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셰프님이 말씀하셨던 구수한 곡물 냄새, 밀의 향기를 따라 자연스레 바게트를 사서 분질러 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꼭다리를 바삭하게 씹고, 그 속의 촉촉함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달콤한 간식들보다 식사빵에 더 먼저 눈이 가다 보니, 너무 배부른 여행자가 되고 말았다. 궁금한 바게트를 계속 사서 먹다 지치면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식사로 빵을 즐기는 방법을 파리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폴앤폴리나의 브랜드 재정의을 기본으로 사진촬영과 텍스팅 작업을 통해 브로셔를 완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