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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유학생 Apr 09. 2020

주민등록증이 미웠다, Ep.01

내 미소 한 조각을 떼어간 듯한 수술

    매번 말하는 것 같아 조금 지겹지만, 17세에 독립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 그랬던 나는 아픔에, 아니 각종 질병에 대응하는 자세도 더 극한 경험을 기반으로 키워왔다. 아마 자기소개서에 이걸 주제로 쓰라고 했으면, 거짓말 아니고 진짜 3000자 채울 수 있다. 소설처럼.


    어찌 되었건 본론에 들어가자면, 내가 처음 무언가 "사람이 혼자 아플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주말에 잠깐 서울로 나왔던 나는 이상하게 일요일 저녁이 되자 배가 쿡쿡 쑤셔왔다. 아랫배 쪽이었는데, 뭐 엄청 아프진 않았고, 조금 이상하다 싶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해 상황을 말했다. “엄마 아랫배가 좀 쿡쿡 쑤셔" 그냥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묘사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잘 아픈 적 없었던 나라서 엄마가 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니 매운 거나 뭐 기름기 먹어서 그런 거 아이가? 엄마가 그런 거 좀 그만 먹으라 캤지?ㅋ 내일 되면 괜찮다"


    웃으며 돌아온 엄마의 답변에 사실 나도 뭐 그렇게 까지 아팠던 건 아니고.. 그냥 찝찝한 정도라서 엄마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넘어갔다. 또 마침 일요일이라서 병원 가기도 애매한 듯하여 그렇게 별다른 예방책 없이 기숙사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월요일에 등교를 했는데? 급식 먹고도 뭔가 자꾸 찝찝하게 아랫배가 쿡쿡 쑤셨다. 수업도 쨀..(?)겸 어린 마음에 학교 근처 병원에 가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다행히 그때 좋은 학교에 다녔던 탓에,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옆에 엄청 큰 병원이 있었고, 각종 검사도 가능한 곳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원을 간다고 하면 잠이 솔솔 오는 6교시와 7교시는 자연스레 패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온갖 진료실에 들어가 받은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거 맹장 끝 충수돌기가 있는데
거기에 염증이 있어요.
흔히 말하는 맹장염이에요.
오늘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오후에 수술 들어갑시다


    조금 오래된 기억이라 절차 하나하나 기억은 명확히 안나지만, 엑스레이니 뭐니 온갖 검사를 다 받고 난 후 들은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었다. 소화불량이라고 예상했는데.. '수술'이라니. 살면서 유치원 때 자전거 타다가 머리 꿰맨 거 빼고는 한 번도 수술대에 올라간 적도 없다. 거기다가 무슨 전신 마취인지 뭔가를 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무슨 이야긴지. 아 뭐 맹장수술이라고 하면 짱구 만화에 나왔던 그 방귀 뀌면 다 낫는 그 병이라고. 죽을병 아니라서 간단하게 하는 병이라고 하지만, 나름 그때 당시 미성년자였던 내게는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고.. 더 중요한 것은 나름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보호자 없이 혼자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 그런데 선생님....
저희 부모님이 대구에 계셔서요


    그때 당시만 해도 소심해서 식당에서 음식 주문도 잘 못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왠지 부모님이 없이도 바로 수술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도 모르게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미뤄보고자 했다.


주민등록증 나왔잖아~ 괜찮아요
보호자 없이 가능해요.
무서운 수술 아니라
빨리 수술해주는 게 좋아요~ ^^


    수술을 조금이라도 미뤄보려고 했던 내게 돌아온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아. 보호자가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것을 인생 처음 처음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팠던 내 맹장 끝의 충수돌기가 18세의 어느 가을날, 더더욱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떼어버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 아픔은 꽤나 장기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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