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의 주변

기다림보다 빠르게 없어지는 것

<책의 주변> 10화

by 이훈보

하루 종일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황홀한 문장 두 개쯤은 떠올렸다 날려버리고..


뜨거운 바닥과는 다르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벽에 발을 데인다. 이런 날엔 글을 쓸 수 없다.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은 지는 네 시간이 지났고 어제 사둔 컵라면 12개가 있어 이십 오분을 고민했다.


물을 붓고, 이때까지도 오늘 글은 글렀다며 영화나 보던 판이었다.


라면이 익는데 4분이 걸린다고 해서 잠시 보던 영화를 이어보았다. 3분이 아닌 4분은 길다 싶어 헤아리지 않으려 한다. 괜히 서투르게 열었다가 덜 익은 라면을 먹는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분명 덜 익은 면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그 시절의 나는 왜 그랬나 싶다.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뚜껑을 연다. 촉이 다 헤진 젓가락으로 흐트러짐 없이 몸집만 불린 것을 감아 흔든다. 서로 놀라지 않아야 하니까 조금 더 참을 수 있다.


그리고... 벌써 바닥이다.


먹겠다고 물을 끓이고 흡족하겠다고 4분을 기다리다가 240초가 너무 긴 것 같아서 그만 잊자는 마음으로 잠깐 눈을 돌려가며 기다렸던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기다림보다 잊는 게 빠를 지경이다.


덕분에 글은 쓰지만 남은 11개가 두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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