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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Feb 03. 2022

찰랑거리게 하라

추락하는 별에서 6화

뒷굽이 너덜너덜한 구두를 신고 달빛에 의지해 고개를 넘는 이들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둘 중 코트도 신발도 더 좋은 이가 앞서 가며 먼저 넘어지곤 했다. 뒤를 따라가던 이는 앞사람이 요란스럽게 넘어진 다음 일어나 주의를 줄 때마다 더욱 조심하며 뒤를 따른다.


루키우스가 세 번째 넘어졌을 때, 에투는 더 이상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제가 먼저 갈까요?"

"괜찮아. 잘 따라오고 있지?"

"예."

"그래 너만 잘 따라오면 되."

"아니 이럴 거면 좀 일찍 가시죠. 아까 낮에도 시간이 있었잖아요?"

"이야기라는 게 낮에 하는 것과 밤에 하는 게 같을 수는 없지.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게 중요해."

"그건 그렇죠."

"그래 어서 가자. 아무튼 나는 넘어져도 되니까 너는 주변을 잘 살펴. 밤눈이 밝아 특별히 널 부른 것이니까 오늘만큼은 네 역할이 중요해."

"예."


숲 저 편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쉼 없이 들리는데도 루키우스는 멈칫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세 고개를 넘어 도착한 마을 어귀에서 루키우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가야 돼."

"예."


마을 서쪽 외곽의 나무 그늘을 밟으며 둘은 계속 나아간다. 


"계십니까?"


목적지에 도착한 루키우스는 먼저 손과 바지에 뭍은 먼지를 털고 문 앞에서 나지막이 소리 냈다. 문 틈으로 불빛이 새 나오는 것을 보면 안에 사람이 있는 듯한데 안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누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왜 대답이 없지요?" 

"쉿."


에투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는 루키우스. 입술에 손을 가져가는 그를 보며 에투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키우스는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물을 세고 다시 불러보기로 했다.


"계십니까?"


문 틈 사이로 비치던 빛이 살짝 일렁이는 것을 보면 분명 사람이 있는 듯했다. 


"흠흠. 누구시오."

"에이머스 님. 루키우스입니다."

"오 이 시간에 웬일 이시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예."


무언가를 급하게 치우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하얀 로브를 입은 에이머스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눈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어디가 불편한지 에이머스의 입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문이 열리기 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일련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에투는 고개를 늦게 숙인 탓에 에이머스의 입에 뭍은 빵조각을 보고 말았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을 잇는다.


"아니오. 그나저나 이 누추한 곳까지 웬일인가?"

"아까 낮에 인사를 드렸는데 제가 아무래도 머리가 나빠 말씀을 좀 더 들어보고 싶어서요."

"오 그런가요? 딱히 저도 아는 것이 없는데 제가 형제님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지혜로우신걸요. 잠깐 괜찮으실까요."

"좋소. 들어오시오."


루키우스와 에투는 에이머스의 허락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을음이 적게 나오는 품질 좋은 촛불이 놓인 탁자에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무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한눈에 봐도 늘 먹던 것과는 사뭇 다른, 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부드러운 질감의 빵이 수북했다. 에투도 루키우스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지만 평소 맡아보기 힘든 신선한 빵 냄새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다리가 안 좋아 먼저 앉겠습니다. "

"예."


에이머스는 둘에게 자리를 내주지도 않은 채 먼저 자리에 앉았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쉬지도 못한 채 루키우스의 부름에 따라 산을 넘어온 에투도 앉아 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자리를 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실은 이제 겨우 식사를 하고 있었다오. 해 질 녘에 안토니오가 다녀가는 통에 식사가 늦었지."

"안토니오 가요? 그렇군요."


루키우스는 에이머스의 대답에 조금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안토니오가 다녀간 덕분에 지금이 제일 자연스럽고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신도 조금 일찍 왔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저는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집에 들렀다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렇군요. 가정이 중요하지요. 나는 가정이 없어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군.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사정이 분명 있겠지."

"아닙니다. 그저 시끄러운 속세의 일일 뿐이죠. 울고 불고 화내고 윽박지르고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긴 하지.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아. 아까 낮에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아무래도 제가 아둔한 것 같아.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요.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의 이야기를 들어도 충분히 깨닫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것을요. 저는 모자란 쪽에 가깝습니다."

"그건 그렇지." 


에이머스는 입술을 일자로 하고 팔짱을 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말이 멈춘 뒤 에이머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흠흠."


빵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는 에투에게 루키우스가 눈짓을 했다. 


"에투. 그것을 가져오게."


한걸음 뒤에 서서 고인 침을 삼키던 에투가 해가 진 이후로 내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루키우스에게 건네주었다.


"그게 뭔가?"


호기심을 보이는 에이머스의 표정을 지으며 루키우스는 쾌재를 불렀다.


"투명한 녹색 병에 코르크로 마감된 와인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흠. 그게 그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그것이군."


에이머스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헛기침을 했다. 루키우스가 그 반응을 놓칠 리가 없었다. 에투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에투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있게."

"예."


에투가 입맛을 다시며 문을 나설 때 에이머스는 잠시 에투를 불러 세웠다.


"자네 저녁시간에 출발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빵이라도 먹으며 기다리게. 그 옆에 우유도 있으니 한 잔 하고."


루키우스는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흥분한 에투를 말릴 수도 없었다. 오히려 에이머스의 아량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도 없이 에투는 벌써 빵을 집어 들고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에투가 신을 내며 밖으로 나간 뒤 루키우스는 에이머스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마개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와인이 한 방울도 새지 않습니다."


에이머스는 머뭇거리다 못 이기는 척 마개를 만져보았다. 단단하면서도 토실토실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마개였다. 


"특이하군."

"맛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미 빵을 충분히 먹어 입안이 텁텁했던 에이머스는 루키우스의 노골적인 제안이 싫지 않았다. 둘 만이라는 게 이럴 때 좋은 것 아닌가.


"그러지."

"잔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꺼내오겠네."

"아닙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저기 책상 오른쪽 아래에 갈색 상자를 열면 잔이 있을 걸세."


에이머스의 안내에 따라 상자를 연 루키우스는 깜짝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장미 세공이 잔뜩 들어간 두 개의 은 잔이 놓여 있었다. 두께나 세공의 정도로 보았을 때 예사 물건은 아닌 게 분명해서 루키우스는 그 부분을 꼭 짚어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자네가 그 아름다움을 안다니 기분이 좋군."


루키우스는 한번 더 감탄하며 에이머스에게 잔을 건넸다. 


"한 잔 따르겠습니다."

"자네는 마시지 않나?"

"저는 술을 잘 못합니다. 술맛도 잘 모르고요. 그러니까 제가 이런 품질의 와인을 맛보는 것은 신의 선물을 두더지에게 건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헛된 일입니다. 오히려 저의 입에 들어가기보다 은총과 함께 들판에 뿌리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아쉽군."


루키우스는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에이머스는 먼저 향을 맡고 호로록 소리를 내며 한 모금을 삼킨다.


"좋아. 아주 좋아. 앞으로 자네와 내가 완성시켜야 할 순간들이 떠오르는군."

"저에게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루키우스는 짐짓 낮은 자세로 이야기를 구했다.


"여기 와인잔이 보이지."

"예."

"어떤가?"

"아름답습니다."

"그 안의 것은 어떤 가."

"붉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

"잘 모르겠습니다."


루키우스의 대답에 에이머스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잔 속의 와인이 가볍게 찰랑이고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걸 만들어야 하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루키우스."

"네. 말씀해주십시오."


루키우스는 무릎을 꿇으며 다가갔다. 에이머스는 그 모습이 무척 흡족했는지 뜸을 들이며 와인을 들이켠 다음 잔을 가볍게 돌렸다. 


"이 근방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 살고 며칠을 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그들은 일주일의 대부분을 먼지가 나는 곳에서 손이 시커멓도록 일을 한다네, 그리고 일을 마치면 통증이 가득한 허리를 펴고 집으로 들어가 바깥소리가 다 들리는 허름한 집에서 겨우 끼니를 때우지. 그다음은 어떤가? 피곤에 절어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잔뜩 굳은 몸과 함께 잠에서 깨지. 그 연속된 굴레 어디에도 아름다움이란 없다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해. 그들이 문을 열고 안에 들어왔을 때 완벽하게 흔들 수 있어야 해. 동굴 속에서 천년동안 잠자고 있는 용의 숨소리처럼 그릉거리는 소리가 발 밑에서부터 계속해서 울려 퍼져 정신을 차릴 수 없어야지. 그때 창으로는 생전 본 적 없는 형형 색색의 빛의 조각들이 쏟아져야 해.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어야 하네. 주름과 먼지, 굳은살로 가득한 사람들을 흔들어야 하는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을 넘어 생각조차 불경한 것으로 느껴지는 곳을 만들어야 해. 마음이 찰랑찰랑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야 한다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차분하고 미동이 없어 보이겠지. 믿음의 굳건한 만큼 순간은 경직될 걸세.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마음은 이 잔 속의 와인처럼 끊임없이 흔들려야 하네. 그때 잘 익은 포도들이 떨어질 거야.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에이머스의 눈에는 희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잠시 숨을 고르는 그의 손에서 펄떡이는 붉은 혀를 보며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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