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에 대한 고차원적 회복에 대하여.
여행은 사람에게 좋은 걸까? 요즘엔 해외든 국내든 사람들에게 여행을 가는 문화가 널리 펴져 있다. 일상의 탈출이든 자아 찾기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이든 여행이 좋다는 건 여행이란 수많은 경험이 자아의 성장을 이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갈 장소가 있어야 여행은 말이 된다. 원점과 타지라는 상반된 두 가지가 여행을 가능케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밖으로 떠난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집 마당에서 황금을 찾았다는 결말은 여행의 의미를 허무하게 만든다(김동률의 ‘이방인’의 가사도 마찬가지다). 그 이야기는 여행이 무의미하다는 걸까.
사실 ‘연금술사’는 주인공이 황금을 원점에서 찾은 건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엘리엇의 시 중 “긴 여행을 끝내고 시작점으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는 말처럼, 여행의 의미는 오히려 ‘돌아옴’에 있다. 그것은 여행 이후 원점에 돌아올 때, 원점을 새롭게 느낀다는 뜻이다. 여행의 의미와 결론은 결국 원점(고향이든 자아든)에 대한 고차원적 재인식에 있다.
돌아올 장소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건 여행이 아니다. 그건 방황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원점은 자연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자연을 조직화해서 문명을 만들었다. 문제는 문명에서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명을 무한정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지구는 유한한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다.
근 100년 동안 인간의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확장됐다. 한편으로 자연의 파괴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 문제를 문명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의 유한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는 기술의 무한한 진보를 믿는 광신이다. 자연의 유한성을 기술 진보의 무한성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 과학이성의 신봉이다.
결국 이러한 자연과 문명의 대립은 기술적 진보가 아닌 무한한 진보에 대한 인간의 그릇된 믿음에서 시작한다. 객관적 기술 문제가 아닌 마음, 세계관의 문제다. 마치 다이어트 약을 먹음으로써 건강해질 수 있다고 다이어트 약 발명을 마냥 기다리며 계속 음식을 미친 듯이 먹는 행동과 같다. 건강은 불로초를 먹는 것이 아니라 먹지 않아야 가능하다. 자연과 문명의 화해는 끝없는 문명의 구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절제에 있는 것이다. 마음(서양 철학이 말하는 욕망 구조)의 변화가 없이는 자연과 문명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자연과 문명의 화해는 철학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며, 사회적 운동 그리고 장기적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다. 가끔 뉴스에서 들리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혹은 ‘지속가능한 개발’이 그렇다. 요즘에는 지속가능한 도시(Sustainable City)로 종합된다. 도시는 문명의 집합체이다. 그러면서도 자연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이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자연과 문명의 화해에 대한 21세기적 표현이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문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향한 문명, 최소한 자연을 생각하는 문명을 말한다. 그것은 타지를 여행한 후, 고향과 자아를 되돌아보며 더욱 성장하고 재인식하는 것과 같다. 자연과 문명의 화해란 그 사이의 상충(Trade-off)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고차원적 회복이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도시공학적 기술을 수반하지만, 근원적으로는 마음의 변화, 욕망 구조에 대한 반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구현될 수 없다. 우리는 문명의 끝, 최첨단(最尖端)을 추구하며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단지 자연을 갉아먹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의 세계관을 반성하지 않으면 화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불태웠던 다리를 다시, 더 튼튼하게 세워 탕아의 삶을 마치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