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짬짜면, 헤겔, 노장 그리고 선 불교

by 도시파도

‘아무거나’
아마 데이트를 하거나, 상사와의 식사를 주문할 때, 듣는 말 중 가장 짜증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거나’라는 뜻은 ‘뭐든지 괜찮다’는 긍정의 말이지만, 다음 말은 ‘그건 별로’, ‘그건 기름진데’로 이어지는 부정의 연속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부정의 연속은 항상 좌절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연속과 다르다. 그가 말하는 첫 번째 부정은 자신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가 말하는 ‘비판’ 혹은 ‘대립’과 비슷한 뜻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정은 한 단계 위의 부정이다. 이는 대립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부정은 비판의 대상과 비판의 주체인 ‘나’를 포함한 대립 상황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웃으며 말하는 ‘모두까기’와 비슷하다.

이런 ‘부정’의 철학이 동아시아에도 있다. <도덕경>과 <장자>가 그러하다. <도덕경>은 우리가 모두 아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한다. 한글로 풀면, ‘도를 도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항상스러운 도가 아니다.’가 된다. 여기서의 핵심은 사실 도(道)가 아니라 상(常)에 있다. 상? 나는 그걸 ‘항상스러운’으로 번역했다. 이를 영어로 옮기면, Constant로 번역된다. ‘항상스러운’은 변하지만 자기동일성(Identity)을 유지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서양철학이 말하는 실체(Substance)와는 큰 차이가 있다. 실체와 ‘항상스러운’의 차이는 변화의 유무에 있다. 실체는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에 반해, ‘항상스러운’은 변화,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말할 수 있으면’으로 해석한 두 번째 도(道)에 있다. 두 번째 도(道)는 말해진 도, 언어화된 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도가도 비상도’는 언어가 항상 변하는 세계 그리고 도(道)를 포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도덕경은 시작부터 언어의 한계를 말하며, 부정한다. 하지만 도덕경은 한문이라는 언어로 쓰인 책이지 않은가??? 도덕경은 언어를 부정하지만 사실 자기 자신까지 부정의 대상으로 넣어버렸다.

조금 참을성을 가지고 <도덕경> 1장을 읽으면, 마지막은 이렇다. “동위지현 현우지현(同謂之玄 玄之又玄)” “그 같은 것을 가물거림이라 한다. 가물거리고 또 가물거린다.” 라고 해석된다. 가물거린다는 표현은 검을 현(玄)을 드러내고자 했다. 여기서 검다는 검정(Black)이 아니라 어둠(Darkness)를 의미한다. 즉 검정이라는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것이 서로 엮어버린 어둠, 혼돈을 의미한다.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현우지현(玄之又玄)’이다. 앞서 ‘그 같은 것을 가물거림’이라 언어로 정의해버렸다. 언어를 부정한 도덕경은 자신의 내적 논리를 지키고자 ‘또’라는 표현으로 언어에 시간성을 부여하는 트릭을 썼다.

이렇게 보면, 도덕경은 언어를 부정하면서 언어 체계에 의해 쓰여진 자기 자신을 부정했으니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 중 두 번째 부정은 대립하는 양자 간의 내적(논리적) 모순으로 발동된다. 하지만 도덕경의 두 번째 부정은 양자 간의 모순을 전제하지 않는다. 도덕경 1장에서 말하는 유(有)와 무(無)는 헤겔의 내적 모순 관계에 있지 않다. 유(有)와 무(無)는 도(道)의 일부로서 현(玄)의 서로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오히려 헤겔의 모순은 유(有)와 유(有)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모순은 ‘지양’을 통해 해소되지만, 그것은 새로운(한 단계위의) 모순의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헤겔의 모순(변증법)은 끊임없이 외부를 갈구하며 확장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말한 것은 헤겔 변증법의 당연한 귀결이다.

유(有)와 무(無)가 현(玄)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건 유(有)와 무(無)라는 언어의 분별적 개념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분별적 개념을 벗어 던진다면, 유(有)와 무(無)는 모두 긍정되는 세계라는 뜻이 된다. 즉, 절대적 부정이 절대적 긍정이 되는 또 하나의 모순이다. 이것이 노장철학의 핵심이다.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대붕과 메추라기의 이야기는 대붕이 뛰어나고 메추라기는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대붕과 메추라기를 구분하는 순간, 이미 언어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대붕이 메추라기에 대한 우월감을 가진다거나, 메추라기가 대붕을 비웃는다면, 이것은 분별이며 언어의 재난이다. 그 분별을 부정한 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장자>의 소요유다.

선(禪) 불교는 이러한 노장(老莊)철학으로 인도의 불교를 자기화한 로컬라이징의 대표적 예다. 선은 언어를 갈등(葛藤, Conflict)이라고 부른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갈등은 선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선은 언어를 인간의 최대의 문제상황으로 본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 밖을 나갈 수 없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선은 언어의 미망(迷妄)을 언어 말고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를 적시한 금강경이나 벽암록을 근본 경전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선의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철스님이 법어로 내신 고승의 시를 들어봐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첫 번째 행은 우리의 언어적 인식을 말한다. 그러다 두 번째 행에서 우리는 언어가 세상을 포착하지 않음(언어의 한계)를 발견한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세 번째 행에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무분별의 세계(절대적 부정)를 맞이한다. 그러나 마지막 행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끝난다. 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절대적 긍정이다. 시 안에서 같은 행을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고차원적 의미를 생산한다. [도덕경에서 보는 언어적 트릭과 유사하지 않은가…]

그래서 선의 결론은 ‘아무거나’라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면 이 말은 앞서 말한 부정의 연속을 뜻하는 ‘아무거나’인가, 절대적 긍정을 뜻하는 ‘아무거나’인가…
내 대답은,

“뭐, ‘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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