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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Jun 28. 2018

너무 쉽게 하는 말, '자존감'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

 내가 미시경제학 수업을 처음 들을 때의 일이었다. 교수가 첫 수업에 한 말은"경제는 절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였다. 그는 프랑스가 국민들의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제한한 법률을 만들고 나서, 프랑스의 비정규직 및 실업자들에게 구직기회가 늘었다며, 경제가 아닌 영역이 경제에게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그런 사례를 정부개입이라는 '예외'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 교수는 그 '예외'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맥락'이었다. 


 교수의 수업 내용은 여러 가지 의미로 내게 남았다. 나는 경제학을 시장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학 수업을 들으면 알겠지만, 미시경제학은 의외로 숫자와 수학법칙 그리고 그래프로 점철되어 있다. 미시경제학의 수학적 형식은 마치 진짜 경제학이 '수학'처럼 느껴지게 한다. 보편적이고 영원한 수학적 진리를 사회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제학에 대한 무한한 신뢰 혹은 맹신을 유도한다. 그러나 경제는 수학이 아니다. 오히려 수학적으로 그려진 시장법칙이 실제 경제에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경제 이외의 영역(맥락)에서 비롯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이유를 '예외'라고 치부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겨도 그걸 소수의 예외라 판단하는 건 앞으로의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경제학의 시장법칙들은 의미가 없는 걸까? 그러나 교수는 첫 수업 이후 남은 강의 동안 경제학의 법칙을 논리적으로 세세하게 설명했다. 나도 나름 열심히 들었다. 그 이유는 교수의 강의가 어떤 의도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였다. 법칙은 모든 것에 통하지 않는다. 법칙이란 특수한 상황과 역사적 조건 하에서 법칙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법칙에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법칙은 오히려 법칙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진짜 법칙의 위치를 찾아간다. 법칙은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냉정히 인정한 순간, 자신의 목표가 확고해지는 것이다. 그 다음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가면 된다. 그래서 교수는 열심히 강의했던 것이다. 


 이런 얘기를 이어가면, 내가 사실은 '법칙'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일부 독자들은 눈치챌 지 모른다. 이건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후회하거나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을 '예외'라고 "그건 내가 아냐"라고 치부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아닌 건' 맞지만,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체적이지 않다. 우리가 '환경'의 산물이라는 말은 그리 오버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환경에 휩싸인 채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그건 아니다. 우리는 조금씩 바뀔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물론 나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건 가혹한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순간, 우리의 목표는 의외로 간단해진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려가면 된다. 어쩌면 한계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선택지가 혼돈인 것처럼. 그러니까 일단 의심해보라. 내가 정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인지. 이건 겸손이나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한낱 인간이다. 하지만 한낱 인간이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경제학 교수처럼.


 이런 생각, 우리가 환경의 산물이면서 무언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모순적인 생각과 믿음,을 "이중사고(Doublethink)"라 한다. '자존감'은 이런 이중사고의 산물이다. 요즘에는 "너는 너 그대로도 괜찮아"식으로 자존감을 사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 같은 게 아니다. 그런 건 신 밖에 못한다. '괜찮아'의 남발은 위로하는 자신을 혹독하게 한다. 자기가 자신을 위로할 때, 위로받는 자신은 좋지만 위로하는 자신은 힘들어진다.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위로하는 자신도 자신의 일부다. 그렇다고 '환경'의 산물이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자존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긍정과 저멀리에 있다. 


 자존감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는 무한한 위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유한한 위로를 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치기 마련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일단 자신을 의심해보라. 믿기지 않겠지만, 믿음과 의심은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니까 말이다. 의심 없는 믿음은 맹신이며, 믿음 없는 의심은 공허할 뿐이다. 이건 종교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의 자존감과 윤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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