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은 안전한 곳에서 나온다

정신과 사용법(6)

by 채영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저는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런데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들어가 보면 정말 ‘없는’ 게 아니라 ‘나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왜냐하면 느낌은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1. 감정은 본능이 아니라 ‘조건’이다

우리는 감정이 본능처럼 자동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신생아도 울음은 터뜨리지만, 그 울음이 안정으로 이어지려면 반응해주는 타인이 필요하다. John Bowlby는 애착이론에서 안전기지가 확보될 때 탐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탐색’은 단지 바깥세상에 대한 탐색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안전해야 느껴진다.



2. 위험한 곳에서는 감정이 잠긴다

어릴 때 감정을 표현하면 비난받았던 사람, 기쁨을 드러내면 시기받았던 사람, 슬픔을 말하면 “그 정도로?”라는 반응을 들었던 사람은 점점 이렇게 배운다. ‘느끼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뇌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잠근다. Stephen Porges의 다중미주신경이론에 따르면 위협 상태에서는 교감신경 항진이나 배측미주신경의 셧다운 반응이 나타난다. 그 상태에서는 섬세한 감정은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버티고, 기능은 유지하지만 느낌은 꺼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할 때는 또렷하고 성과도 내지만 혼자 쉬는 시간에는 아무 느낌이 없다. 그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껴본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 안전이 먼저다

사람이 울 수 있으려면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도 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과거에 충분히 안아져본 사람이다. 안전이 먼저 확보되어야 감정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치료의 시작은 해석이 아니라 안전이다. 조언이 아니라 버텨주는 자리다.



4. 느낌이 돌아오는 순간

치료실에서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몇 달 동안 아무 느낌 없다고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조용히 말한다. “선생님, 오늘은 좀 슬픈 것 같아요.” 그건 병이 악화된 게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감정이 살아났다는 뜻이니까. 느낌은 용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느낌은 안전에서 나온다.



당신은 기쁨이 비웃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곳, 슬픔이 설명 없이 존재해도 되는 자리가 있는지? 만약 없다면 당신의 감정이 잠겨 있는 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생존 전략이었기에. 그리고 이제, 조금씩 안전을 배우면 된다. 느낌은 안전한 곳에서 천천히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