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사용법(6)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저는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런데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들어가 보면 정말 ‘없는’ 게 아니라 ‘나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왜냐하면 느낌은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이 본능처럼 자동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신생아도 울음은 터뜨리지만, 그 울음이 안정으로 이어지려면 반응해주는 타인이 필요하다. John Bowlby는 애착이론에서 안전기지가 확보될 때 탐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탐색’은 단지 바깥세상에 대한 탐색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안전해야 느껴진다.
어릴 때 감정을 표현하면 비난받았던 사람, 기쁨을 드러내면 시기받았던 사람, 슬픔을 말하면 “그 정도로?”라는 반응을 들었던 사람은 점점 이렇게 배운다. ‘느끼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뇌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잠근다. Stephen Porges의 다중미주신경이론에 따르면 위협 상태에서는 교감신경 항진이나 배측미주신경의 셧다운 반응이 나타난다. 그 상태에서는 섬세한 감정은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버티고, 기능은 유지하지만 느낌은 꺼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할 때는 또렷하고 성과도 내지만 혼자 쉬는 시간에는 아무 느낌이 없다. 그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껴본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울 수 있으려면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도 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과거에 충분히 안아져본 사람이다. 안전이 먼저 확보되어야 감정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치료의 시작은 해석이 아니라 안전이다. 조언이 아니라 버텨주는 자리다.
치료실에서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몇 달 동안 아무 느낌 없다고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조용히 말한다. “선생님, 오늘은 좀 슬픈 것 같아요.” 그건 병이 악화된 게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감정이 살아났다는 뜻이니까. 느낌은 용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느낌은 안전에서 나온다.
당신은 기쁨이 비웃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곳, 슬픔이 설명 없이 존재해도 되는 자리가 있는지? 만약 없다면 당신의 감정이 잠겨 있는 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생존 전략이었기에. 그리고 이제, 조금씩 안전을 배우면 된다. 느낌은 안전한 곳에서 천천히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