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강한 사람을 흔들리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나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본다.
지난주 방문했던 기억력 저하 환자분은 아마도 교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본인의 논문에 큰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몇 시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늘 함께 병원에 오는 아내는 짧은 진료 중에도 서운함이 터져나온다. “여보,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그런 적 없어.”의 매회 반복. 남편은 자신의 기억력 저하를 인정하지 않는다.
치매에서는 자신의 기능 저하를 인식하지 못하는 신경학적 현상도 있다. 특히 알츠하이머성 치매에서는 자기 모니터링 기능이 약화되어 결함을 자각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단순히 인지기능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때 누구보다 유능했고, 존중받았던 그가 본인의 기억력 저하를 인정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전체를 내려놓는 일 일수도 있다.
“도와줘.” “요즘 내가 좀 힘들어.” 이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작아진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버틴다. 부정하고, 논쟁하고, 화를 낸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부정을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로 설명한다. Sigmund Freud는 부정을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 밀어내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약함은 자존감을 위협하기에 우리는 약함을 숨기는 쪽을 택한다.
진료실에서는 반대의 장면도 보게 된다. “제가 요즘 좀 예민해요.” “기억이 예전 같지 않네요.” “제가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오히려 단단해 보인다. 흔들리는데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순간 현실과 싸우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진짜 강함은 완벽함이나 무너지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직면하는 용기같다. 부정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을 너무 두려워하는 마음의 증거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통과해 “그래, 내가 좀 약해졌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강해진다.
우리는 모두 나이, 관계, 상처 때문이든 언젠가는 약해지는 시기가 있다. 그때 강해 보이려고 애쓰기보다 조용히 인정하는 연습을 하는 것. 어쩌면 그게 가장 성숙한 형태의 힘일지도 모른다. 강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