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뒤 청결 강박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젖병을 삶고, 소독하고, 말리고, 다시 확인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과할 정도의 노력인데, 엄마들은 말한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요.”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될수록, 아이를 지키기 위한 행동은 점점 집요해진다.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정교해진다. 보이지 않는 위험까지 상상하게 되고, ‘내가 놓친 단 하나’가 아이를 다치게 할 것만 같다.
정신분석에서는 사랑이 커질수록, 그 사랑을 중화하려 반대 감정도 함께 커진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공격성도 함께 증가한다는 이야기다. 너무 귀여워서 깨물고 싶어지는 감정— 사실은 사랑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넘을 때 튀어나오는, 아주 인간적인 균열이다.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가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어떤 약을 써도 우울과 자살 사고가 줄지 않던 사람이었다. TMS 치료를 받고, 조금씩 삶이 회복된 뒤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사나 봐요.”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겁이 많아졌어요. 예전엔 밤길에 누가 따라오면, 그냥 죽지 뭐… 이랬는데 지금은 무서워요.” 삶이 다시 소중해지자, 그에게 공포가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의 그는 더 위험했지만 덜 무서웠고 지금의 그는 더 안전해졌지만 더 겁이 많아졌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느낄 때는 사실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인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불안해진다. 내 말 한마디, 내 표정 하나가 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지 이 관계를 망치지는 않을지 계속 계산하게 된다. 그래서 더 좋아할수록 서운한 것도 많아진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취약해진다. 잃을 수 있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안은 ‘상태가 나빠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너무 소중해지면, 그것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떠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조심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더 불안해진다. 아이를 사랑하게 된 엄마처럼,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그리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된 연인처럼.
불안은 종종 사랑의 부작용처럼 찾아온다. 살아 있음이 선명해질수록 삶은 더 무겁고, 더 아프고, 더 무서워진다. 그래도 우리는 안다. 이 불안은 공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소중해진 무언가에서 비롯되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