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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Jul 08. 2019

한국타이어 사장이 고집한
'3천억 건물'을 지은 사람

이노베이터 -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1화

뜨거운 여름이었다. 시간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테크노돔의 나머지 공간들은 2016년 10월 18일 준공식을 앞두고 공사가 대강 마무리돼가고 있었다. 기숙사와 테크노돔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 공사만 유독 늦어지고 있었다. 안내를 해주던 테크노돔 공사 현장 관계자가 말했다. “지하 통로만큼은 준공식 직전까지도 공사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테크노돔엔 기숙사로 통하는 지하 통로보다도 훨씬 난이도 높은 공사 구간들이 많았다. 테크노돔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거대한 타원형 지붕이나 순백의 실내 공간을 가로지르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나 수많은 최첨단 타이어 실험 시설들이 그랬다. 정작 마지막까지 현장 관계자들을 애먹인 공사는 테크노돔과 기숙사를 연결해주는 길이 50미터 남짓한 지하 통로였다.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의 고집 탓이었다. 테크노돔은 한국타이어가 총사업비 3000억 원을 들여서 대전 죽동에 건설한 새로운 연구개발센터다. 한국타이어 내부에서 테크노돔은 “조현범 사장의 자식”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조현범 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젝트를 주도해왔다. 테크노돔은 타원형 지붕의 연구동과 원형 모양의 기숙사동까지 2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조현범 사장은 테크노돔과 기숙사를 잇는 지하 통로가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같기를 원했다.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미래적 공간감을 구현하기 위해 수차례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조현범 사장한테 테크노돔과 기숙사를 잇는 지하도는 단순한 통로 이상이었다. 시간 터널이어야만 했다. 조사장은 한국타이어 연구원들이 기숙사에서 연구동으로 걸어 들어올 때면 마치 현재에서 미래로 빨려드는 듯한 타임 슬립을 경험하길 원했다. 미래는 테크노돔 건축의 핵심 개념이다. 기능적으로도 테크노돔은 한국타이어의 미래 기술이 개발되는 R&D센터다. 형태적으로도 미래적이다. 테크노돔의 외형은 마치 은빛 UFO가 지상에 내려앉은 것만 같다. 내부는 순백의 퓨처리스틱한 공간으로 설계됐다.


건축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조현범 사장은 미래라는 테마가 단순히 테크노돔의 설계 컨셉트 정도로만 소비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누구든 테크노돔에 입장하는 그 순간부터 미래 시간으로 이동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기를 원했다. 특히 기숙사에서 나온 연구원들이 미래로 출근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길 원했다. 스스로 미래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미래 기술을 현재화시키기도 쉽다. 더 이상 미래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현범 사장은 그렇게 건축으로 생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우선 기숙사 1층 로비에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온다. 50미터 정도 길이의 직선 통로가 나온다. 천정과 바닥에선 백색 조명이 흘러나온다. 빛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 시간대가 바뀌는 중이다. 복도의 소실점에서 테크노돔의 지하 1층과 만난다. 4층 천정까지 탁 뚫린 드넓은 은백색 광장이 펼쳐진다. 공중엔 타원형 포드와 사선형 에스컬레이터들이 공중부양하듯이 매달려 있다. 포드는 회의실이나 휴게실로 쓰이는 계란 모양의 독립 공간이다. 사방팔방의 투명 유리벽 안으론 최첨단 연구실들이 배치돼 있다. 미래의 산실들이다.


조현범 사장이 이렇게까지 지하 통로에 공을 들인 건 테크노돔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테크노돔은 단순한 연구개발센터가 아니다. 하드웨어로 소프트웨어를 혁신하려는 기획이다. 사옥 건축으로 기업 문화를 바꾸려는 도전이다. 지하 통로 설계를 통해 매일 출근하는 연구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듯이 말이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에서 끝나면 소용이 없었다. 건축의 변형이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사고방식의 변경까지 이어져야만 했다. 건축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궁극적 목적은 기업 혁신이었다. 준공일이 다가오는데도 끈질기게 지하 통로 설계에 매달렸던 건 그래서였다. 테크노돔을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조현범 사장이 인용하곤 했던 명언이 하나 있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말이다. “우리는 건물을 짓지만 건물은 우리를 만든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1943년 10월 처칠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재건할 것을 약속하면서 했던 연설의 일부다. 노먼 포스터가 테크노돔을 설계했지만 테크노돔이 한국타이어를 다시 만들어주기를 원했단 말이다.  


프리미엄 타이어 시장 공략 위해서는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연구개발센터 신축 작업 이상의 기업 혁신 작업으로 진화한 데는 배경이 있었다. 2011년 무렵이었다. 한국타이어는 대전시 유성구 장동에 있는 기존 연구개발센터의 시설 확장을 고려하고 있었다. 장동 연구개발센터는 1982년에 설립됐다. 지난 30년 넘게 한국타이어 기술경쟁력의 원천이었다. 타이어 제조업은 기계공학과 화학공학이 융복합된 산업이다. 먼저 화학공학을 바탕으로 타이어의 원재료인 고무 신소재를 개발한다. 소재에 따라 타이어의 연비와 제동력이 현격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발된 고무를 어떻게 주형하고 어떤 자동차에 적용시킬지부터는 기계공학의 영역이다. 타이어의 모양에 따라 또 자동차와의 궁합에 따라 타이어의 성능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장동 연구개발센터는 두 기술 부문에서 모두 글로벌 탑티어 수준까진 올라섰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한국타이어는 글로벌 7위 타이어 제조사다. 글로벌 탑3가 목표다. 국내에선 부동의 1위다. 글로벌 경쟁에선 브릿지스톤과 미쉐린과 굿이어와 피렐리 같은 막강한 상대들과 겨뤄야 한다. 하나 같이 만만치가 않다. 지금껏 한국타이어는 매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왔다. 자동차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타이어 수요도 정비례로 늘어나던 호황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호황기는 끝났다. 이젠 프리미엄 타이어 시장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 BMW나 벤츠나 포르쉐 같은 프리미엄 차종의 타이어로 한국타이어가 선호되도록 시장을 설득해야만 했다. 전부 기술력이 뒷받침돼야만 가능한 목표였다.


장동 연구개발센터의 규모와 시설로는 무리였다. 연구원들의 근무 환경도 별로 생산적이질 못했다. 연구원들은 늘 타이어 고무 냄새에 찌들어 살아왔다. 박사급 연구원이 실험용 타이어를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기 일쑤였다. 연구원들의 조직 몰입도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다. 조직 몰입도는 경영학에서 조직의 경쟁력을 진단하는 핵심 척도다. 어떤 조직에 몰입한 개인은 해당 조직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 하며, 조직의 과업을 위해 보통 이상의 노력을 투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한다고 정의된다. 셋 다 아니었다. “자동차 제조사에 못 가서 타이어 회사에 입사했다”는 자조까지 있을 정도였다.


급한데로 한국타이어 경영진은 포화상태인 장동 연구개발센터 대신 죽동에 새로운 연구개발센터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만 해도 죽동 신규 R&D센터는 넘쳐나는 연구개발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시설 증축에 가까웠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만 시설도 따라서 늘리는 전형적인 대증 요법이었다. 한국타이어는 늘 그래왔다. 장동 연구개발센터가 미로처럼 변해버린 것도 그렇게 주먹구구식 증개축만 거듭해온 탓이었다. 미로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조직 문화도 자연히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장동 연구개발센터는 한 건물에서 몇 년씩 함께 일해 온 연구개발인력들도 서로 얼굴 한번 마주치기가 어려운 복잡한 구조였다.


정작 한국타이어 내부의 어느 누구도 이런 무분별한 증개축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려고 나서지를 않았다.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규모 시설 투자에 따르는 리스크를 지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 이게 진짜 더 큰 문제였다. 장동 연구개발센터의 미로 같은 건물 구조는 마치 한국타이어의 기업 문화와 닮은꼴이었다. 고속성장으로 외형은 커졌지만 내부엔 잔뜩 성장의 찌꺼기들을 껴안고 있는 모양새 말이다. 문제가 있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문제를 서로한테 떠넘기는 관료적 조직 문화도 찌꺼기 중 하나였다. 기업 사옥의 형태는 대체로 기업 조직의 구조를 반영한다. 


한국타이어의 그레이존을 찾아라

2011년 당시 한국타이어는 매출 6조 원을 돌파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대개 기업은 계단식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성장기와 둔화기가 주기적으로 순환한다. 계속 성장하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둔화기는 성장기에 쌓인 조직적 모순들을 해결해나가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합당한 성장통을 겪어야 더 큰 퀀텀점프를 도모할 수 있다. 예방접종과도 같다. 한국타이어는 성장 둔화기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덕분에 조직 내부의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온 측면이 있었다.


조현범 사장은 2011년 12월 한국타이어 사장으로 승진했다. 본사의 경영운영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조사장은 한국타이어 내부의 그레이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존이란 팀간 업무 영역의 경계에 있어서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직 내 회색 지대를 뜻한다. 성장의 찌꺼기들은 그레이존에 잠복해있기 마련이다. 조현범 사장이 이끄는 경영운영본부는 그레이존을 탐색하면서 고속성장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른바 시스템 버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레이존 탐색 임무는 강대규 당시 경영운영본부 팀장한테 맡겨졌다. 강대규 팀장은 조현범 사장이 직접 발탁한 외부 인재였다. 강팀장은 CJ그룹 출신이었다. 조사장과는 학연이나 지연 같은 개인적 인연은 없었다. 우연히 만났다. 경영적 관점이 잘 맞았다. 조현범 사장은 한국타이어에서 나고 자란 성골 인재들이 즐비한 본사 경영운영본부에 강대규 팀장을 덜렁 발령냈다. 강팀장은 존재만으로도 사건이었다. 한국타이어는 2011년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칠순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데다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고속 성장해온 오래된 제조업체는 순혈 조직화되기 쉽다. 본사에도 생산 현장에도 한국타이어 출신들만 즐비했다. 강팀장은 존재만으로도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사장의 특명을 받고 별동대처럼 조직의 그레이존을 탐색하고 다녔다. 강대규는 오너3세 조현범이 몰고올 한국타이어 혁신의 척후병이었던 셈이다.


한국타이어 죽동 연구개발센터의 근시안적 증축 계획안이 강대규 팀장이 찾아낸 그레이존이었다. 대전의 연구개발인력들은 당면한 연구개발과제를 쳐내느라 바빴다. 서울 본사는 대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구개발센터의 임원들은 문제를 알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했다. 조직 논리에서 벗어난 강대규 팀장 같은 외부 인력이 경영 진단을 하자 비로소 그레이존이 드러났다. 조현범 사장도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한국타이어 역삼동 본사 뒤엔 조사장이 평사원들과 자주 찾는 김치찌개집이 있다. 조사장은 팀장급 이하 직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걸로 유명하다. 임원급 회의에선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소통이 결합되면서 드러난 조직의 허점이 바로 주먹구구식 연구개발센터 증축 계획안이었다.


건설 계획이 한국타이어 혁신 프로젝트로

조현범 사장과 강대규 팀장은 연구개발센터의 기존 증축 계획안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선 연구개발인력들을 상대로 면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수석과 팀장급뿐만 아니라 주니어급과 신입사원급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설을 이용하는 연구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연구개발센터의 근무 환경에 불만이 컸다. 한국타이어는 성장만 추구하는 올드한 회사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근무 환경과 시설 장비와 복지 시설과 기숙사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연구개발센터를 방문한 클라이언트들 앞에서 자부심을 느낄만한 근무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이 대목에서 조현범 사장과 강대규 팀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했다.


조현범 사장은 기존 죽동 연구개발센터 증축 계획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존에 파묻혀 있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순히 연구개발 공간을 늘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타이어를 대표하는 두뇌 집단이 한국타이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을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한국타이어는 또 기업 문화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했다.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회피하고 미봉책으로 일관하는 관료적 조직 문화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글로벌 탑3가 되려면 이제까지처럼 패스트 팔로우 전략으론 부족했다. 퍼스트 무버가 돼야만 했다. 그러자면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보수적 조직 문화부터 바꿔줘야 만했다. 조현범 사장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혁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조사장의 머릿속에서 죽동 연구개발센터 건설 계획은 점차 한국타이어 혁신 프로젝트로 진화돼갔다. 이때부터 하드웨어를 통한 소프트웨어 혁신이라는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테크노돔 프로젝트, 수면 위에 오르다

솔직히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한국타이어라는 기업 안에서 쉽사리 수용된다는 건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타이어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제조업체다. 제조기업은 투자 대비 성과에 대단히 민감하다. 비용 효율성이 곧 제품 만진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장동 연구개발센터가 주먹구구식 증개축으로만 일관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비용 탓이 컸다. 딱 필요한만큼만 자린고비처러 비용을 쓰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이렇게 건축의 형태는 늘 조직의 문화를 반영한다. 테크노톰 프로젝트에는 물경 수천억 원이 소요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오너3세가 추진하는 사업이라지만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한국타이어 경영진 내부에서 일으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사실 테크노돔 같은 연구개발센터를 짓는데 드는 건설 비용은 투자 대비 성과를 숫자로 따지기가 어렵다. 당장 실험 물량이 늘어난다거나 생선 설비가 증강될지는 몰라도 그것이 제품 경쟁력으로 이어져서 매출로 직결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크노돔 같은 혁신적인 건축물을 통해 새로운 기업문화가 창출되고 능동적이고 혁신적인 기업 문화야말로 21세기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는 개념은 자칫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발전될수록 한국타이어 임원진 내부의 우려와 냉소도 동시에 커져갔다. 대부분 한국타이어에 평생을 바쳤고 공장과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보수적인 임원들이었다.


정작 이런 임원진의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조현범 사장이 가진 테크노돔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도 정비례로 커져만 갔다. 한국타이어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부터 하드웨어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혁신하겠다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아니었습니다. 테크노돔 기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오히려 혁신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더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테크노돔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반대와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타이어라는 기업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자연발생적인 성장통을 겪지 못했던 한국타이어에게 테크노돔 프로젝트는 인공적인 성장통이 돼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대형 건축 계획은 결과로써도 혁신이지만 과정으로서도 혁신이 될 수 있다. 1980년대 미테랑은 파리 개조 사업인 그랑 프로제를 통해 파리라는 도시를 혁신했고 동시에 국가 시스템도 혁신했다. 흥선대원군 역시 경복궁 중건 계획을 통해 조선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진시황 역시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과정의 혁신과 결과의 혁신을 동시에 노렸다. 건축은 결과로써도 과정으로써도 혁신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건축을 가장 효과적인 기업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던 경영인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미쓰 반 데어 로에의 제자인 건축가 김종성을 발탁해서 대우그룹의 크고 작은 빌딩들을 맡겼다. 그 과정에서 대우 조직을 진화시켰다. 롯데월드타워이란 결과를 통해 롯데그룹이 원했던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차그룹이 삼성동 GBC를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과정과 결과도 같다. GBC의 설계는 건축가 김종성이 맡았다. 모두가 건축을 통해 기업 혁신을 노렸던 기획들이었다.


사진 한 장으로, 테크노돔을 시작하다

건축은 조직 안에서 정치적 시험대도 된다. 테크노돔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테크노돔 프로젝트에 찬성하냐 반대하냐가 곧 조현범 사장의 개혁 드라이브에 찬성하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점이 됐다. 동시에 혁신적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평가 기준이 됐다. 물론 한국타이어 안에서 오너3세인 조현범 사장한테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임원은 많지 않다. 자칫 반혁신적이라고 낙인찍힐 위험도 있었다. 실리도 명분도 없단 말이다. 테크노돔 프로젝트는 그렇게 조현범 3세 경영 체제의 정치적 추진력이 됐다.


그렇다고 테크노돔 프로젝트에 우려와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한국타이어는 오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악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기업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한국타이어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켜온 임원들이 즐비하다. 서승화 한국타이어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서승화 부회장은 2007년부터 한국타이어 대표를 맡고 있다. 고령의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을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전문경영인이다. 서부회장은 신입사원에서 그룹 회장까지 오른 신화적인 인물이다. 17년 동안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한국타이어의 해외 시장 개척을 진두지휘했다.


서부회장이 그룹 대표를 맡았던 지난 10년 동안이 한국타이어한텐 최고 성장기였다. 한국타이어는 창사 이래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평사원에서 대표이사까지 오른 서부회장의 존재감 덕분이었다. 서승화 부회장은 테크노돔 프로젝트를 적극 지지하지만 동시에 다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한국타이어는 아직 후계 구도가 결정되지 않았다.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한텐 친형인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사장이란 강력한 경쟁자가 있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한국타이어의 지주회사다. 조현식 사장과 조현범 사장은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지분을 각각 19.32퍼센트와 19.31퍼센트씩 갖고 있다. 거의 비등하다. 조양래 회장의 지분이 제일 많다. 23.59퍼센트다. 결국 조양래 회장의 지분 23.59퍼센트가 누구한테 가느냐에 따라 후계자가 결정된다.


당장은 형제 모두 각자 사업 영역에서 성과를 낼 필요가 있다. 이때 후견인이자 캐스팅보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서승화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자연히 조현식 사장과 조현범 사장은 모두 서승화 부회장을 필두로 한 경험 많은 임원진들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들 뒤엔 아버지인 조양래 회장이 있다. 테크노돔 프로젝트로 정치적 시험대에 오른 건 기실 조현범 사장 자신이란 얘기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임원진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사진 한 장 덕분이었다. 강대규 팀장은 한국타이어 연구개발센터와 기숙사의 적나라한 현실을 임원진들 앞에서 보여줬다. 나이 지긋한 경영진들도 한국타이어의 근무 환경과 생활환경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는 장탄식이 튀어나왔다. 21세기 글로벌 탑3에 도전하고 있는 한국타이어의 근무 환경은 고작 19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변변한 휴식 공간조차 없어서 직원들은 하루 종일 사무실과 화장실과 회의실만을 삼각형으로 오고갈 뿐이었다. 창의적인 발상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테크노돔 프로젝트에 소극적이었던 임직원들도 더 이상은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진 않았다.


건축도 정해졌고, 건축가도 정해졌다

처음부터 노먼 포스터 경이었고 포스터 앤 파트너스였다. 노먼 포스터는 미래지향적인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다. 노먼 포스터는 언제나 건축 공학의 최첨단에 서왔다. 1985년에 완공된 홍콩상하이은행 본점이 대표적이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노먼 포스터를 건축계의 스타로 발돋움시킨 건물이다. 노먼 포스터는 홍콩상하이은행 본점에 당시만 해도 현수교에만 적용되던 특수 공법을 적용했다. 보통의 다리는 여러 기둥 위에 상판을 얹어놓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현수교는 거대한 교각들이 다리 상판을 줄로 붙잡아서 들어 올리는 원리로 지어진다. 이런 공법은 섬과 섬을 이어놓을 정도로 긴 다리를 최소한의 교각만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교각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상판의 무게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노먼 포스터는 여기에 주목했다. 홍콩상하이은행은 동양의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다. 건물이 지세의 혈을 막지 않아야 했다. 중심부가 공중부양을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현수교 공법을 건물에 적용하면 빌딩 내부에 거대한 빈 공간을 조성할 수 있었다. 기둥과 벽을 제거해도 건물이 지탱될 수 있어서다. 노먼 포스터는 빌딩 중간층에 거대한 태양 반사판을 설치했다. 태양의 운행 궤적을 따라 움직이면서 건물 깊숙한 곳까지 자연 채광을 전달해줬다. 홍콩상하이은행은 인텔리전트 빌딩의 효시가 됐다. 하이테크 건축의 발원지가 됐다.


홍콩상하이은행 본점 이후부터 노먼 포스터는 매번 당대 건축 공학의 한계에 도전해왔다. 전세계 도시들이 노먼 포스터의 건축을 통해 미래 도시로 진일보했다. 뉴욕의 허스트타워, 런던의 거킨 타워와 런던 시청, 스페인의 빌바오 지하철역, 스코틀랜드의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가 노먼 포스터의 대표작들이다. 노먼 포스터의 건축회사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건축으로 미래를 실현하려는 기업들이 맨 먼저 찾는 설계 사무소가 됐다.


뉴욕 허스트 빌딩은 클래식한 페이퍼 미디어 회사라는 과거와 미래를 준비하는 디지털 미디어 회사라는 허스트의 현재가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디자인을 거쳐서 구현된 건축물이다. 1930년대에 건축가 조지프 어번이 설계한 아르데코풍의 하단부 위에 벌집 형태의 삼각구조물을 쌓아올린 듯한 미래적인 빌딩이 지어졌다. 이 건물 덕분에 <에스콰이어>와 <엘르>를 소유한 세계적인 잡지 회사인 허스트는 페이퍼와 디지털을 아우르는 진보적인 미디어 회사라는 혁신적인 이미지를 얻었다.


조현범 사장과 한국타이어가 처음부터 노먼 포스터와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 꽂혔던 건 이런 사례들 때문이었다. 조현범 사장은 한국타이어를 타이어 제조사 이상의 최첨단 테크놀로지 기업으로 정의했다. 언제나 건축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하이테크 건축이야말로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기업의 모습과 딱 맞아떨어졌다.


조현범 사장은 건축주로서 건축가에게 건축을 의뢰한다는 것이 단순히 설계 도면을 그려달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아는 인물이었다. 노먼 포스터 같은 거장 건축가와 함께 일한 다는 건 한국타이어라는 기업의 특성과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건축을 통해 공간적으로 재해석해달라는 겸손한 의뢰였다. 하드웨어로 소프트웨어를 혁신하려는 조현범 사장한텐 한국타이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거장 건축가의 통찰이 반드시 필요했다.





앞으로 <이노베이터> 매거진에는 매주 월, 화요일에 혁신경영인과 혁신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연재합니다. 이어서 연재될 노먼 포스터 2화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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