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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Jul 09. 2019

노먼 포스터는 어떻게
건축으로 기업을 혁신했나

이노베이터 -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2화

한국타이어와 노먼 포스터의 만남

물론 다른 후보 건축가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포스터 앤 파트너스를 무게에 두고 있었지만 그 밖에도 많은 건축가들을 세밀하게 고려해봤다. 기술 기업다운 접근법이었다. 최첨단 타이어를 개발하는 과정과 유사했다. 수많은 화학 재료들의 물성을 테스트하고, 그중에서 최고의 재료를 엄선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타이어를 비교 시험하면서, 최적의 타이어를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한국타이어의 장기다. 테크노돔 프로젝트도 그렇게 진행됐다.

 

백여 명 이상의 건축가들이 물망에 올랐다. 자하 하디드도 있었다. 자하 하디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수평적이고 곡선형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자하 하디드는 2016년 3월에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BMW 테마파크를 설계한 건축가 쿠프 힘멜브라우도 있었다. 쿠프 힘멜브라우는 이른바 해체주의 건축가다. 건물의 형태를 완전히 해체해서 전혀 다른 구성으로 재조립한다. 건축물의 물성 자체를 완전히 재해석하기 때문에 해체주의 건축가로 불린다. 쿠프 힘멜브라우가 손을 대면 단단한 콘크리트도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한다. 대표작인 BMW 테마파크는 거대한 파도가 넘실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관됐다. 한국타이어가 꿈꿨던 테크노돔의 모습은 결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시종일관 미래주의적이었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첫사랑은 변함없이 포스터 앤 파트너스였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 때문이었다. 강대규 팀장은 말한다. “한국타이어 테크노돔의 알파요 오메가는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입니다.” 형태와 구조만 놓고 봐도 테크노돔은 분명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설계한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는 자동차 기업의 미래지향적 연구개발센터의 교과서다. 맥라렌은 테크놀로지 센터를 통해 단순한 모터 스포츠 기업에서 미래 자동차 기술을 선도하는 최첨단 기술 기업으로 도약했다.


맥라렌의 CEO 론 데니스는 무지막지한 결벽증으로 유명하다. 과연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는 투명한 유리 건물과 거대한 인공 호수가 태극무늬처럼 맞물리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어우러져 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설계답게 인공 호수는 단순한 구경 거리가 아니다.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에선 포뮬러원 자동차의 터보 엔진 실험부터 공기 역학 실험까지 수많은 열역학을 연구들이 진행된다. 당연히 무지막지한 열이 발생한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이 열을 인공 호수를 통해 식히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수냉식 건축물이란 얘기다. 론 데니스는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모두 휴고 보스를 입혔다. 작은 나사 하나까지도 맥라렌 스타일로 새롭게 디자인했다. 론 데니스는 분명 나사를 디자인한 게 아니었다. 맥라렌이라는 기업 조직의 디테일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건축으로 기업을 혁신하는 게 가능했다.


조현범 사장은 테크노돔을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에 버금가는 연구개발센터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과정의 혁신과 결과의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포석이었다. 그러자면 건축가는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를 설계했던 노먼 포스터여야만 했다.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 작업을 거치며 포스터 앤 파트너스엔 자동차 기술 기업에 대한 설계 노하우가 축적돼 있었다. 한국타이어한텐 포스터 앤 파트너스의 역량과 경험이 모두 필요했다. 이미 한국타이어 경영운영본부 안엔 테크노돔 테스크포스팀까지 구성된 상태였다. 조현범 사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타이어 테스크포스팀은 단도직입적으로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서도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를 설계했던 설계6팀을 지목했다. 그렇게 2013년 한국타이어와 노먼 포스터의 만남이 이뤄졌다. 


기업 사옥은 곧 기업의 비전과 문화다 

뜻밖이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이미 한국타이어에 대해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타이어는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주요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다. 특히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를 설계한 설계6팀은 자동차 산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다. 그들로선 한국타이어도 주요 관찰 대상이었다. 어쩌면 여러모로 한국타이어가 건축을 통한 기업 혁신을 시도할 시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설계6팀은 한국타이어가 테크노돔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 하는지를 단박에 간파했다.


타이어는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다. 완성차에 들어가는 수만 개의 부품 가운데 자기 브랜드를 가진 몇 안 되는 제품 가운데 하나다. 정작 소비자들한텐 검은 고무 제품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자동차의 가속과 제동에서 타이어가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다시피 하는데도 말이다. 타이어 회사는 자동차 업계를 잘 모르는 일반 소비자들한텐 언제나 완성차 회사의 협력 업체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조현범 사장은 타이어가 테크놀로지라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을 원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도 동의했다.


포스트 앤 파트너스와의 수차례 미팅이 거듭될수록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기업 혁신의 비전도 구체화돼갔다. 건축의 힘이다. 건축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물리적인 형태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기업 사옥이 대표적이다. 기업이 지닌 비전과 문화가 벽과 기둥과 바닥과 지붕의 재료와 형태를 통해 구현된다. 법인체인 기업이 비로소 물리적 몸뚱아리를 갖는 게 기업 사옥 건축이다. 사옥의 모습은 기업의 영혼을 반영한다. 테크노돔이 그랬다. 테크노돔의 꼴이 갖춰질수록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기업의 미래도 구체화돼갔다. 단순히 한국타이어가 원하는 걸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그려준 게 아니었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한국타이어가 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랐던 걸 찾아준 셈이었다. 그렇게 하드웨어를 통해 소프트웨어가 규정됐다.


한국타이어가 거장 노먼 포스터와 포스터 앤 파트너스를 견인한 부분도 있었다. 이제까지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한국에서 건축물을 설계해본 적이 없었다. 외환위기 즈음에 삼성그룹과 인연이 좀 있었다.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뒤론 한국과는 인연이 없었다. 테크노돔은 노먼 포스터가 한국에 짓는 첫 번째 건축물이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도 테크노돔을 시작으로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할 작정이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와 한국타이어는 죽이 잘 맞았다. 최고의 건축가와 건축주 조합이었다. 특히 한국타이어의 조현범 사장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건축의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마땅하다. 노먼 포스터의 거킨빌딩이 대표적이다. 달걀 형태는 빌딩 주변의 바람 방향을 바꿔줘서 주변 건물과 보행자에 미치는 영향을 극소화하고 건물 내부의 온도를 조절해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달걀 모양으로 짓고 싶어서가 아니라 달걀 모양으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달걀 모양이 됐단 얘기다. 이렇게 기능주의적 설계를 하자면 건축주의 요구가 분명해야만 한다. 건축주가 건물에 어떤 기능을 요구하는지가 분명해야 건축가는 건물이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기술 기업만이 기술 기업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 기업인 한국타이어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가 가진 건축적 자긍심과 건축 공학을 통해 이루려는 디자인적 목표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줄 아는 기업이었다. 한국타이어 스스로가 수많은 완성차 업체라는 클라이언트들을 상대로 자신의 기술적 비전을 실현시켜야 하는 기업이다. 그 안에서 성공과 실패와 기대와 좌절을 모두 겪어온 75년 경험이 테크노돔 설계 과정에서 십분 발휘됐다. 건축주의 수준이 건축가의 수준과 맞아야 건축물의 수준도 높아진다.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그때까지 한국타이어는 테크노돔 프로젝트 말고도 태안 드라이빙 센터 건설 계획과 서울 역삼동 본사의 판교 이전 계획까지 모두 3가지 건축 기획안을 제각각 추진하고 있었다. 서울 역삼동 본사는 노후화된 지 오래였다. 한국타이어의 글로벌 사령부 역할을 하기엔 비좁았다. 태안에 대규모 드라이빙 센터가 건립되면 초고성능 타이어 개발을 위한 테스트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더 이상 포뮬러원이 꿈이 아니었다.


테크노돔 프로젝트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나머지 2개의 건축 기획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태안 테스트 드라이빙 센터는 쉽지 않은 기획이다. 타이어 테스트에 접합한 평탄한 대지를 찾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제대로 된 테스트 드라이빙 센터를 만들려면 대략 40만 평 이상의 대단위 부지가 필요하다. 평탄하지 않은 땅을 고를 경우 토목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테크노돔 프로젝트는 태안 드라이빙 센터 프로젝트에도 촉매가 됐다.


사실 여기에도 정치가 깔려있다. 태안 드라이빙 센터는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사장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다.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조현범 사장의 업적이라면 태안 드라이빙 센터는 조현식 사장의 실적이다. 두 개 건축의 성패에 한국타이어의 미래 후계 구도가 직결돼 있다. 처칠의 말처럼 우리는 건축을 만들지만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테크노돔 설계에서 조현범 사장이 고집했던 지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테크노돔은 이름 그대로 돔 형태의 건축물이다. 직선이 거의 없는 곡선형 건축물이다. 언뜻 원형의 타이어를 연상시킨다. 한국타이어는 테크노돔의 곡선이 타이어의 원형에서 왔다는 식의 일차원적 해석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국타이어의 회사 로고 같은 직접적인 상징물이 건축물을 장식하는 것도 꺼려했다. 한국타이어의 외형이 아니라 내면이 형상화된 건축물을 원했기 때문이다. 한국타이어의 역사와 한국타이어가 일해온 방식과 한국타이어의 기업 문화가 건축적으로 형상화된 건축물이어야 했다.


테크노돔이 돔인 건 한 지붕 아래에 있는 원컴퍼니를 상징한다. 한국타이어는 전 세계 120여 개 국에 판매망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다. 이 정도 규모의 유통망을 가진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 정도다. 수많은 한국타이어의 임직원들이 한 지붕 아래에 싱글 한국타이어로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실제로도 테크노돔은 열 개의 건물이 아트리온이라고 불리는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구조다. 기존 연구개발센터에 있었던 기계와 화학 연구시설들이 각기 다른 위치에 배열되면서 이런 구조를 띄게 됐다. 한국타이어는 이런 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최고의 타이어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회사다.


비전과 신뢰를 담은 순백의 공간

테크노돔에서 포스터 앤 컴퍼니가 가장 정밀하게 설계했던 부분은 돔의 처마였다. 홍콩상하이은행 본점도,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도, 거킨 빌딩도, 결국 태양빛을 건물 내부의 어디까지 끌어들일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던 건축물들이었다. 빛이야말로 건축의 핵심 변수다. 테크노돔의 지붕은 빛을 가려줘야 하지만 동시에 적절한 양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이는 기능도 동시에 수행해야만 했다.


이건 테크노돔이 위치한 대전 지역의 위도와 경도와 기후 변화까지 모든 자연적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었다. 테크노돔 처마의 커빙 라인은 수차례의 시뮬레이션을 거치고도 여러 차례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여름과 겨울 태양의 위도 차이를 대입해서 사무실 내부의 자연 채광과 냉난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모양을 찾아냈다. 테크노돔의 지붕은 중간중간에 틈새가 나 있다. 그 선을 따라 지붕 아래 건물들이 배열되면서 지붕 아래에 있지만 내부는 자연광 덕분에 빛이 충분히 들어오도록 설계됐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테크노돔을 순백의 공간으로 설계했다. 타이어는 검은색이다. 순백의 미래적이고 과학적인 공간에서 검은색의 최첨단 타이어가 탄생하는 것이야말로 한국타이어라는 기업의 본질이었다. 백색은 또 투명성과 신뢰성을 상징한다.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다. 자동차는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소비재다. 타이어의 성능은 사람 목숨과 직결돼 있다. 테크노돔은 사람들에게 비전와 신뢰를 줄 수 있어야만 했다.


시공 과정에서도 애초의 설계 콘셉트를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크노돔 실내엔 거대한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여러 개의 은백색 콘크리트 기둥들이 있다. 워낙 두터운 기둥이라 테크노돔 실내의 인상을 좌지우지할 정도다. 콘크리트 기둥이 완벽한 은백색을 띠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조차 백색 페인트로 칠해버리자는 의견을 냈을 정도였다. 한국타이어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수소문 끝에 특수한 콘크리트 양생 공법을 도입했다. 제조원가가 높아졌다. 기꺼이 감수했다. 기둥이야 말로 한 지붕 원 컴퍼니를 떠받히는 상징물이었다. 임직원이며 협력업체며 경영진이며 소비자였다. 한국타이어의 미래를 떠받치는 기둥들이다.



3000억 원으로 건물만 만든 게 아니다

테크노돔은 2014년 5월에 착공됐다.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았다. 공사비는 2300억 원 정도다. 여기에 투자비 등을 합하면 총사업비는 결국 3000억 원을 넘어섰다. 최초 예산 규모의 두 배를 넘어섰다. 그런데 조현범 사장은 테크노돔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HR3.0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했다. 한국타이어의 인사 제도를 개편해서 인력 구조를 재편하려는 기획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능력 있는 직원은 조직 내부에서 중용될 수 있는 인사 제도를 만든다는 게 HR3.0의 골자였다.


한국타이어는 제조업체다. 제조업의 기업 문화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이며 상명하복적인 경향을 띠기 일쑤다. 수많은 인력들이 하나의 기계처럼 치밀하게 맞아 돌아가야만 틀림없는 완제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HR3.0은 이런 보수적인 조직 문화에 혁신적인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는 제도였다. 연공서열을 깨서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하고 진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직급과 호칭을 분리해서 직급이 낮아도 얼마든지 프로젝트의 팀장으로서 혁신을 주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HR3.0은 즉각적으로 한국타이어 조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제도였다.


테크노돔과 HR3.0은 사실상 한국타이어 혁신의 양동작전이었다. 테크노돔의 모습은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조직의 모습을 형상화한 결과다. 그런 건물 안에서 인간 조직이 건물 구조를 닮아가기를 기대한다. HR3.0은 그런 옷에 맞는 몸을 만들기 위한 조직 혁신 작업이었다.


테크노돔 한가운데엔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가 놓여 있다. 3층에서부터 1층까지를 사선으로 곧장 이어준다. 사실 테크노돔에서 1층부터 4층까지를 오갈 때 가장 많이 쓰일 동선은 수직의 투명한 원통형 엘리베이터다. 사선의 에스컬레이터는 실용적이면서 상징적인 동선이다. 대형 사선 에스컬레이터는 수평적 조직과 수직적 조직 사이를 혼용한 사선적 조직의 상징이다. 1층부터 3층까지 위계를 뛰어넘어 소통이 가능하다. 동시에 조직의 위에서 아래로도 정보가 흐른다. 수평적인 소통과 수직적인 위계를 모두 겸할 수 있다.


사선 조직은 21세기 초일류 기업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수직적인 속도와 수평적인 소통이 겸비된 기업만이 초일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사선의 은백색 에스컬레이터는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다. 동시에 직급을 뛰어넘어 직무에 따라 스스로 리더로 에스컬레이트할 수 있다는 점에선 HR3.0의 목적과도 맞아떨어진다. 


사무실이 소통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테크노돔 복도의 난간은 유난히 두텁다. 보행자의 안전만이 목적이 아니다. 난간은 사람이 기대기 편하도록 설계돼 있다. 연구원들이 오가다가 만나서 대화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난간이 두터울수록 편하게 기댈 수 있다. 필요하면 자료를 올려놓을 수도 있다. 난간 전체가 간이 회의실이 된단 뜻이다.


연구원들도 서로 소통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혼자 골몰해봤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연구과제의 실마리를 이웃 연구원과 커피를 마시다가 찾아낸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혼자 연구실에서 골몰하다가 찾아지는 게 아니다. 외로운 천재의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연구개발은 두뇌의 병렬화를 통해서만 촉진된다. 두뇌의 병렬화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는 과정이다. 테크노돔은 그런 두뇌의 병렬화가 기하급수적으로 발생되도록 설계됐다.


노먼 포스터와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애플의 신사옥인 캠퍼스2를 설계했다. 생전의 스티브 잡스와 노먼 퍼스터가 애플 캠퍼스2 설계에서 가장 중시했던 것도 두뇌의 연속적 병렬화였다. 애플 직원들이 수시로 만나서 헤어지고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포춘>은 “애플이라는 기업이야 말로 스티브 잡스가 남긴 최고의 제품”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애플 캠퍼스2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캠퍼스2를 설계했던 노먼 포스터의 경험이 테크노돔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반도체가 IT산업의 쌀이라면 타이어는 제조업의 쌀이다. 타이어는 아무리 내구성이 좋아도 결국엔 닮기 마련이다. 지속적으로 수요가 창출된다. 덕분에 한국타이어도 타이어 1만 개를 생산하면 1만 개가 다 팔리는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정작 내일의 먹거리를 고민해온 적이 없는 타이어 산업은 거꾸로 위기에 약할 수밖에 없다. 곧게 수직적으로 성장만 해온 대나무가 부러지는 것과 같다. 한국타이어는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예상하지 못한 위기들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왔다. 유가 상승 같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도 있지만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블랙스완 같은 시나리오도 있다. 중요한 건 위기의 내용이 아니다. 어떠한 위기가 오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의 유연성이 중요하다. 대나무처럼 수직적인 조직이 아니라 물처럼 수평적으로 흐르는 조직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테크노돔은 거의 모든 내외벽이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상 직선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국타이어는 남성적이고 수직적인 기업이었다. 테크노돔의 곡선은 이런 수직적이고 남성적인 특성을 상당부문 완화시킨다. 한국타이어는 여성 인력의 숫자가 적다. 본사에선 빠르게 늘고 있지만 공장이나 연구시설에선 여전히 남성 위주의 조직이다. 21세기 조직은 남녀의 다양성이 확보돼야 한다. 테크노돔의 곡선적 특성들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란 얘기다. 한국타이어의 지향점이다. 한국타이어 경영진은 이런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올드하고 남성적이었던 제조업 현장의 문화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테크노돔 전체의 테마를 이루는 곡선은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유연성을 상징한다.


테크노돔은 로비부터가 물이 흐르는 듯하다. 2층과 3층으로 올라갈수록 곡선은 파도처럼 너울댄다. 특히 상층부의 계란형 포드에 이르면 이런 곡선은 하나에 집중된다. 특수 제작된 아크릴 덕분에 완벽한 투명 공간이 된 포드는 직원 휴게실과 회의실로 쓰이게 된다. 이런 곡선의 물결들이 모여서 유연한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의 유연한 생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아이디어로 완성되는 공간이 바로 포드다. 팟은 테크노돔 안에서 자라난 열매와 같다. 테크노돔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두뇌의 병렬화가 얽히고설켜서 영근 혁신적 아이디어가 공중의 포드에서 구체화된다. 혁신의 열매다. 


임원실을 작고 투명하게 만든 이유 

테크노돔의 임원실은 비좁기 짝이 없다. 임원실의 크기가 임원의 권세를 설명해주는 한국 기업의 풍토에서 보면 혁신적이다 못해 혁명적이다. 게다가 임원실은 투명한 유리로 돼 있다. 임원이 임원실에 숨어서 보고만 받던 시대는 지나갔단 뜻이다. 조현범 사장의 경영 스타일을 함축하는 공간이다. 임원이 소통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자면 사무실에 스스로를 가둬둬선 안 된다.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서 소통해야만 한다. 그나마 비좁은 임원실은 회의실로도 전용될 수 있다. 경영진이 있을 곳은 사무실이 아니라 복도다.


현대 경영학에서 임원들은 전혀 새로운 도전을 요구받고 있다. 임원은 결재하는 자가 아니다. 때론 때리거나 때론 팀장이거나 때론 과장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소통 업무야 말로 임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결재의 최종선에 숨어 있는 업무 방식이야말로 임원 자신과 조직 전체를 모두 퇴행시키는 요인이다. 임원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조현범 사장이 테크노돔의 임원실이 작고 투명하게 만든 이유다. 변화된 환경이 임원 개개인한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할 거란 계산이 깔려 있다.


테크노돔의 회의실엔 1인용 탁자가 다수 배치돼 있다. 연구원들이 필요에 따라 자리 배치를 바꿔가면서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공간이 유동적이면 생각도 유연해진다. 연구시설은 대부분 투명한 유리를 통해 모두가 서로가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돼 있다. 사무 공간엔 파티션도 없다. 직원들이 이른바 짱 박힐 곳이 없단 말이다. 테크노돔 요소요소에 이런 디테일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개방성은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선 사무실 안에서 자기 공간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조직엔 수평성과 수직성이 모두 필요하듯이 업무에도 협력과 집중이 동시에 필요하다. 한국타이어는 오랜 고민 끝에 일단 개방성에서부터 출발해보기로 했다.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개방성을 바탕으로 조직원 개개인이 자기 식대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국타이어가 테크노돔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진화한 지점이다. 일단 환경만 만들어주면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들이 무수하게 일어나게 돼 있다. 개방성과 유연성이라는 조건만 계속 유지해준다면 작은 변주들은 커다란 진화의 물줄기로 수렴되게 돼 있다. 한국타이어는 테크노돔 설계 과정에서 수백 명의 연구원들과 기타 조직원들을 설문 조사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조직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진단했다. 테크노돔을 짓는 과정 자체가 조직에 대한 현미경 관찰이 이뤄지는 과정이었단 얘기다. 바꾸라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다. 물줄기를 바꾸려면 돌을 치워주고 도랑을 파줘야 한다. 테크노돔은 한국타이어의 고차원적 경영 혁신이다.


강대규 팀장은 말한다. “분명히 투명한 유리로 가득 찬 테크노돔 안에서도 개개인은 프라이버시를 찾아서 숨어들게 돼 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필요한 일일 겁니다. 중요한 건 그런 행동들처럼 조직 진화의 일부이고 결국 한국타이어가 추구하는 기업 문화로 수렴될 거라는 믿음입니다.” 문화는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최선이다. 기다려야 한다. 하드웨어를 통한 소프트웨어의 진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타이어는 테크노돔이 한층 한층 완성해나가면서 이걸 깨달았다. 그렇게 한국타이어의 경영 문화도 한 차원 진화했다. 


기업의 미래를 지어놓은 건축물

테크노돔의 4층에 올라가면 어쩌면 테크노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과 만날 수 있다. 작은 인공 연못이 돔 지붕의 구멍을 통해 빛과 마주하는 테라스다. 낮에는 햇살이 비추고 밤에는 별빛이 비친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테크노돔의 한쪽 모서리에 뚫린 둥근 구멍 같은 공간이다. 원래 이곳은 VIP 전용 공간이었다. 바로 옆엔 사장실이 자리했다. 테라스는 외부 손님들이 올 때만 개방될 예정이었다. 설계 당시만 해도 그랬다.


정작 준공일이 가까워지면서 테라스 공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조현범 사장은 설계를 다시 변경했다. 직원 휴게 공간으로 개방해버렸다. 테크노돔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공간을 연구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다. 가장 높고 아름다운 곳을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으로 운영하면서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소통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건축가 노먼 포스터의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한국타이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모든 거대 건축이 그렇듯이 테크노돔도 경영 혁신이지만 정치 이슈일 수밖에 없는 탓에 상황에 따라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테크노돔은 경영적 혁신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변수다. 미래 기술의 근원이면서 미래 권력의 근간이다. 이제 테크노돔 안에서 한국타이어의 연구개발조직이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건축의 최종 성패가 달려있다. 지난 2019년 3월 한국타이어그룹은 사명에서 타이어를 뺐다.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이름은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이 됐다. 핵심 계열사인 한국타이어는 한국타이어&테크놀로지가 됐다.


테크노돔이라는 건축은 이렇게 한국타이어라는 기업을 서서히 바꿔놓고 있다. “우리는 건물을 짓지만 건물은 우리를 만든다”던 처칠의 말은 진리였다. 건물을 지어놓는다고 끝이 아니란 말이다. 기업 사옥은 많다. 테크노돔처럼 기업의 미래를 지어놓은 건축은 많지 않다. 테크노돔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다. 테크노돔이란 하드웨어를 통한 한국타이어의 소프트웨어 혁신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이노베이터> 매거진에는 매주 월, 화요일에 혁신경영인과 혁신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연재합니다. 다음화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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