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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10. 2019

엄마의 트라우마

40년 만에 이해하게 된 엄마의 불안

덜그럭 덜그럭, 쿵 쿵


"에이, 이거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러게, 이거... 이렇게 좀 해봐요..."


주방에서 엄마와 아빠가 무언가와 씨름하고 계셨다.


주말이면 친정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 아빠의 조심스러운 소음을 알람 삼아 일어났다.


"왜? 뭔일 인데?"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의 보온조끼를 걸치고는 주방으로 갔다. 전기밥솥의 뚜껑이 문제였다. 압력밥솥인 탓에 뚜껑 부분이 제대로 잠겨야 밥이 되거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아예 닫히지를 않았다.


"밥솥을 사야 하려나?" 평상시와는 다른 과감한 결심이 묻어나는 엄마의 말에


"뭘 사? 고쳐서 써야지!" 평상시와는 다른 소심한 아빠의 대답!


"아유! 뭘 고쳐요? 하나 사면 되지.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할게" 평상시 엄마 아빠를 잘 못 챙기는 미안함에 내가 강하게 밀어붙여 밥솥이 전사하신지 3일 만에 새로운 밥솥이 들어왔다.


 이전에 사용하던 밥솥과 같은 브랜드였지만 디자인이 조금 달랐고, 특히 LCD창에 들어오는 안내 문구가 달랐다. 새 밥솥을 제 자리에 놓은 엄마는 전기밥솥의 전원선을 꽂았다 뽑았다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불이 다 들어와 있으니까 좀 불안해서, 설명서를 읽어보니 장시간 사용하지 않을 땐 전원을 뽑아놓으라고 되어 있네, 이 불빛이 다 안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밥솥의 전원을 꽂으니 밥솥의 정면 LCD창에 백미, 찰진 밥, 중간 밥, 쾌속, 잡곡, 현미, 찜, 슬로 쿡, 건강죽, 자동세척 이란 글자와 시간, 예약, 알림, 잠금, 취사 중, 보온 중이란 각종 기능들이 마치 도라에몽의 마법 주머니같이 원하는 건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다는 듯 오렌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 정말 불이 다 들어오네? 아! 아마도 취사를 하면 선택한 기능에만 불이 들어올 거야. 그리구 엄마! 모든 가전 제품의 설명서에는 장시간 사용하지 않을땐 전원을 뽑으라고 되어 있어! 이 밥솥만 그런게 아니라"

나의 말에도 엄마는 왠지 자꾸만 밥솥의 전원을 뽑고 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 왠지 이게 다 켜져 있으니 불안하네"


"아! 엄마! 이게 취사 시작하면 꺼질 거라니까!" 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이어서 "아 진짜, 그게 뭐가 불안해! 내가 엄마 닮아서 전기랑 불을 무서워하잖아!"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거실로 나오다가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을까? 할머니와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했었다. 인조 가죽을 구두에 붙이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가죽을 붙이는데 본드를 사용했었다. 본드를 담은 페인트통을 방의 한가운데 놓아두고 그 주변으로 할머니와 엄마가, 그리고 가끔은 동네 아줌마들이 함께 모여 일을 했다.


어느 날,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할머니와 엄마는 군데군데 하얀 양초를 세워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외풍이 셌던 방엔 황소 같은 바람이 들랑날랑했고,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거대한 괴물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다가 그만 양초가 본드통 쪽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오른 본드통을 엄마가 들었다. 아마도 밖으로 들고나갈 심산이었던것 같다. 그런데 엄마가 움직이는 그 궤적을 따라 불이 번졌다. 거대한 화마의 혓바닥이 방을 집어삼키는 모습이었다. 방의 세 면이 불길로 휩싸였다. 엄마가 나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너무 놀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던 나는 엄마가 본드통을 내려놓고 방안 한구석에 놓인 이불을 들어 불을 덮는 모습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깜깜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사시던 고모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 우리 집에 불이 났어!"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고모할머니는 맨발로 우리 집을 향해 뛰어가셨고 잠시 후 고모 할머니가 불이 꺼졌다며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방에 들어가니 불에 탄 이불과 전쟁을 막 마치고 난 잔다르크와 같은 엄마가 있었다. 엄마의 발등은 화상으로 붉게 부풀어 있었다.  



아마도 그 기억 탓인지 나는 전기와 가스에 대한 과한 두려움이 있다. 부루스타를 사용할 때도 되도록 의자를 뒤로 밀어 앉고, 전력 과부하로 두꺼비집이 자동 차단되면 남편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린다.


어릴 적 그 상황을 목격했던 나도 이런 트라우마가 있는데, 그 불을 직접 껐던 엄마에겐 더 강한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 생각에 미치고 보니 그날 엄마의 불안함은 이상한 것도, 유난스러운 것도 아닌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였던 엄마는 할머니의 시어머니 노릇을 견뎌야 했고, 학업을 마치지 않은 작은아버지의 학업과 군생활, 결혼까지 뒷바라지해야 했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손위 고모의 자식 셋을 함께 건사해야 했고, 엄마의 남동생도 얼마간은 돌보아야 했었다.


젊은 시절 씩씩하고 악바리 같았던 우리 엄마는 80을 바라보는 지금도 씩씩하다. 그런데 그 씩씩함 뒤에 감추어진 트라우마를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왔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똑똑한 채 하는 딸마저 엄마의 불안함을 유난스러움으로 단정해 버릴 뻔 했으니어쩜 딸보다 밥솥이 효녀(?)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엔 엄마와 소주 한 잔 마시며 지난 화재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눠봐야겠다. 그 사건 이후 40년 동안 엄마의 발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발등의 화상은 아물었는지, 그 놀란 마음의 상처는 또 어떠한지, 밥솥의 LCD 불빛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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