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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05. 2019

생각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북한산 아래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남들은 주말이면 시간 내고 마음 내어 찾아오는 북한산이 내겐 동네 마실 나가는 것과 같았던 그때, 나는 뭐가 그리 마음 복잡한 일이 많았었을까 시간만 나면 산에 올랐다. 목적은 단 하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스포츠용품 매장을 지나고 막걸릿집을 지나고 공용화장실을 지나야 비로소 시작되는 등산로. 그 시작점에서 나는 신발끈을 다시 한번 동여매고,  얼린 500ml 생수병을 배낭의 옆 쪽 주머니에 옮겨 넣고, 내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들을 전두엽 근처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자!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엉킨 생각을 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나의 감정과 사실을 구분한다. 머릿속에 구역을 나누어놓고 적당한 위치에 각각의 것들을 집어넣는다. 오늘의 등산이 끝나고 나면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명확한 사고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도 칸트도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걷기와 산책을 하며 문제의 해결책을 찾곤 했다 하지않았는가. 그러니까 나도...


그런데 돌계단이 너무 많다. 


'어휴... 숨차라... 웬 계단이 이렇게 많아? 그런데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나의 이성이 차곡차곡 쌓아가던 생각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나의 육체가 던진 '숨차'라는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로부터 나는 계속 생각의 시작 언저리만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며 산의 중턱에 이르렀다. 


얼굴이 벌게지고 땀은 흐르고 목이 마르고 다리에 힘이 풀리자 더 이상 생각에 진전이 없었다. 앉아서 쉴 만한 넙적한 바위만을 찾고 있었다. 이왕이면 눈앞의 시야도 탁 트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도 받지 않을 만한 곳. 그런 곳을 찾기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다리와 눈에 집중되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생각은 나중에 하고, 저기 저 바위에 앉아서 한 숨 돌려야겠다.'


산 중턱의 바위는  적당하게 등산로를 등지고 골짜기를 향해 놓여있어 휴식의 장소로 딱이었다. 

등산방석을 깔고 앉아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얼었던 물이 반쯤 녹아있어 시원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크게 쉼 호흡을 하고 앉아 있자니 땀이 식으며 슬쩍 추위가 느껴졌다. 보온병에 들은 커피를 꺼냈다. 산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이어폰을 꼽고 순간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는다. 


'무슨 생각을 하기로 했더라?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꼭대기 까지만 갔다 오자'


모든 나의 산행은 이런 패턴으로 반복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산에 올랐다. 나는 내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을 언젠가 완수하기 위해 그렇게 산을 찾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각에서 멀어지기 위함이었어. 숨이 턱턱 막히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은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을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었고, 나는 그것을 즐겼던 거야. 생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이 좋아서 나는 산에 올랐던 거야'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나는 늘 산엘 갔다 오면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날 밤에 책상에 앉으면 발바닥이 아팠지만 집중력은 좋아졌다. 


오늘 만난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중 오래전 나의 산행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 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있을 때 왔다.
나는 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고 때로 한 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물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낸 스무 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단 두 권만이 모국어의 영토 밖에서 쓰였다.
심지어 여행기도 집으로 돌아와 썼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을 빌려 정리하자면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산엘 가지 않는다. 나의 산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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