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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ug 01. 2018

인생 시나리오를 각색하다

몸에 생긴 멍울이 내게 준 기회

며칠간 지속되는 열대야로 에어컨과 선풍기를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지내는 밤은 새로운 날의 시작부터 몸과 맘을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띵한 머리와 찌뿌둥한 몸을 현실 세계에 적응시키려 다른 날 보다 더 많은 스트레칭을 하는데 허벅지에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분명 어제까지는 없었던 멍울이 무릎 위 10센티 미터 되는 지점에 숨어있었다. 육안으론 크게 튀어나와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2센티 남짓한 멍울이다.


이상했다. 어딘가에 부딪혀 부어오른 것이라면 멍자국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보이는 피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여러 가지 증상을 고려해볼 때 '지방종'이란 양성 종양과 가장 비슷했다. 그렇지만 지방종은 멍울이 말랑말랑하고 피부 밑에 고착되어 있지 않아 피부 아래서 약간씩 이동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멍울은 딱딱했고 피부 아래 고정되어 있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인터넷상에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답변은 얼추 비슷했지만 딱 한 가지 공통된 의견은 병원에 가서 초음파 등으로 정확한 진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그러나 그 날은 일정이 꽉 잡혀있어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일찍 병원에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개의 포털을 오가며 갑작스럽게 방문한 나의 멍울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ctrl+c, ctrl+v 형태로 생산된 정보들이었다. 일반적인 증상들과 조금 다른 나의 멍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양성종양은 왜 생기는지 알 수 없으며, 하나 혹은 다량의 멍울이 있을 수 있고 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그냥 두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심미적인 이유로 수술로 제거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멍울이 단단하거나, 빠르게 커진다면 악성 종양일 수 있다는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단단한'.... 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윙윙거렸다. 급기야 '악성'이란 글자가 점점 커지더니 스마트폰의 화면을 뚫고 나와 집채만큼 커져 나를 짓눌렀다. 


문득 내가 들어놓은 보험을 헤아렸다. 내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내 가족이 차례로 지나갔다.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고 지금 진행 중인 일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24년 만의 기록 경신이라는 올여름의 열대야 하나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한 고민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였다. 진료를 받을 부위가 허벅지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펄럭 펄럭 한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다. 옷을 고르고 나니 두 번째로 밀려오는 고민은 외과를 가야 하나 정형외과를 가야 하나 아니면 피부과를 가야 하나였다. 준종합병원으로 가기로 했으니 가서 물어보자. 


지하철에서 내려 병원까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지난주에 목 부위 통증으로 진료를 받기 위해 한 번 갔던 길인데, 이렇게 멀었었나 싶다. 한참을 걸어가다 혹 지나쳤나 싶어 온 길을 돌아보았다. 아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약간 커브진 길 안쪽으로 병원 주차장이 보였다. 


어릴 적 누군가 그랬다. 삶이 힘들어지거나 목적지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병원에 가보라고. 건강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충분할 거라고. 그땐 그러려니 했다. 그건 건강한 사람들이 복에 겨워하는 소리다. 어떻게 아픈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안위를 위로받으라 하는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초조하구나....


종합병원이라 이른 아침부터 바글바글하다. 접수 대기표를 뽑아 들고 앉아 있자니 에어컨이 가동 중인데도 식은땀이 났다. 내 차례가 되어 접수대에 가니 무슨 진료를 할 거냐 묻는다. 


"허벅지에 멍울이 생겨서 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외과로 접수를 해주겠단다. 6번 질료실 앞에서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한다. 20대로 보이는 여자 직원 앞에서 나는 무척이나 공손해졌다.


6번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진료 접수 현황 모니터 중 외과 항목에 이*정 이란 이름이 보인다. 이별(*) 정?, 이눈꽃(*)정?, 이땡(*)정? 그러고 있는데 "이수정 님~"을 부른다. 외과 환자는 내 앞에 한 명, 신경외과에는 모두 가운데 이름이 별(*)인 환자 6~7명이 간호사의 숭고한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의사 선생님께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한다. 


'훗... 친절한 양반... 그렇지만 안녕 할리가 없잖아...'

슬쩍 솟아 나오는 삐딱함을 억누르고 공손하게 진찰 의자에 앉는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어제 아침에 일어났더니 갑자기 허벅지에 이런 멍울이 잡혀서요..."


"어디 볼까요?" 하며 허벅지의 멍울을 꾹꾹 누른다. 


"아픈가요?"


어제 읽었던 인터넷의 글엔 양성 지방종은 아프지 않고, 악성이라면 아프다고 했다. 아... 어떻게 말해야 하지? 사실 아픈 건지 아프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다. 어느 부위의 살이라도 이렇게 꾹꾹 누르면 압통이 느껴질 텐데, 멍울 때문에 아픈 건지 압력 때문에 아픈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대답을 했다. 의사 선생님도 그다지 나의 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더니 연필꽂이에서 검은 네임펜을 꺼내 들고 내 허벅지에 딱 멍울만 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는


"초음파 찍고 나서 어떻게 치료할지 알려드릴게요"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서 어떤 정보도 읽을 수 없었다. 일어나려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그러나 호기롭게(아니 호기롭게 보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별거 아니죠?" 


나만 알아차릴 만큼 떨리는 목소리.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역시나 살짝 웃는 표정으로 말하는 의사 선생님, 알고 보니 웃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니 무표정


"나빠 보이진 않네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종이 하나를 쥐어주며 


"수납먼저하시고3층초음파실로가셔서입구에벨누르고기다리셨다가초음파찍고다시내려오세요"


숨 한번 쉬지 않고 내게 던진 말을 통째로 고스란히 담았다가 진료실을 나서며 음절대로 다시 끊어 조합했다. 3층 초음파실에 도착하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외부와 차단된 촬영실 앞에 종류별 촬영실에 해당되는 벨이 있고 그 벨 아래 접수증을 넣을 수 있는 함. 벨을 누르면 담당 간호사가 나와 접수증을 들고 들어간 후 순서가 되면 들어가서 촬영을 한다.


순서가 되어 촬영실로 들어가자 간호사는 네임펜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 위로 젤을 듬뿍 짜 놓는다. 눕지도 앉지도 못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기다리는데 단발머리의 여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젤이 발라진 허벅지를 가로방향으로 문지르고 다시 세로 방향으로 문지르기를 몇 번... 

화면상 멍울로 보이는 검은 부분의 크기를 재는 듯했다. 


"이게 어제 아침에 갑자기 생겼어요" 


뻘쭘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을까? 내가 던진 말, 그리고 들려오기를 바랐던 대답은 


 "흔히 생기는 거예요" 뭐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하루아침에 생겼겠어요?" 


"..."


"아까 진료 본 곳으로 가셔서 기다리세요"


9만 원을 내고 찍은 초음파치곤 너무 간단하다 싶은 맘이 들었다. 가성비가 떨어지는군...


다시 6번 진료실 앞에 와서 앉았다. 내 앞에 놓인 TV에서는 고 노회찬 의원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노의원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한 날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하루 종일 멍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 장례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미안했고 장례식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엔 '악성종양' 괴물이 뇌간이고 전두엽이고 할 것 없이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대기했고, 참다못해 간호사에게 약간의 컴플레인 성 질문을 했고 그 후에도 두 명의 환자 진료가 지난 후에야 내 차례가 왔다. 의사 선생님은 나의 초음파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여기 이렇게 보이죠? 피하지방에 약간 염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드시고 2주 후에 다시 오세요"


"약만 먹으면 되나요?" 


"네, 혹 2주 전이라도 아프거나 다른 증상이 생기면 바로 병원에 오세요"


"2주 동안 약을 먹나요?"


"아니요 약은 1주 치만 드릴 겁니다"


"네... 그럼...."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뭘 물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나왔다.


간호사는 또 내게 흰 종이를 쥐어주며 수납처로 가라 했다. 또 돈을 내야 하나? 하며 갔더니 처방전을 준다. 더 이상 수납할 것은 없다고 말한다. 왠지 고맙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작은 멍울은 나를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나락으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스크루지 영감이 떠올랐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인생의 계획을 세웠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늘 희망에 찬 멋진 미래를 꿈꾸고 살아왔다.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만든 적이 없었다. 마치 나는 늙지도 않을 것이며, 나는 실패도 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프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죽지도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깨달았다. 그런 시나리오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나이가 나에겐 감당하기 힘들었고, 지금의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의 삶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실패할 것을 목적으로 두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성공할 것이다라는 바람만으로 살 수는 없다. 

나는 늙어간다는 것을 지나치게 인식해서도 안되지만 영원히 젊은 채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는 항상 건강해야겠지만 어떤 병도 나만 비켜가는 행운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죽음은 지금의 나와 상관없지만 나도 결국은 죽을 것이란 것은 100퍼센트 진실의 차원이다.


1주일간의 약을 처방해주고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한 이유는 약물치료가 유효했는지 점검하자는 이야기겠지.

3일간 변화가 없어 보이던 멍울의 크기는 오늘에서야 약간 줄어든 것 같다. 


나는 인생시나리오를 각색했다. 다양한 가능성을 추가한 열린 스토리. 그러나 마지막은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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