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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Feb 21. 2019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갑자기 찾아온다.

아들과 다녀온 독일-프랑스 여행

열일곱 살 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말했다.


"엄마, 독일에 가 보고 싶어"

 

"갑자기 독일? 왜 독일이야?"


"베를린 장벽의 잔해와 전차 박물관이 보고 싶어서"


나와는 달리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모토로 사는 아들 녀석이라 그런 관심이 내심 반가웠다.


"그럼, 가야지! 가자! 이왕 가는 거 독일에서 프랑스까지 들렀다 오자."


"엄마 돈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니야?"


"돈 많이 들어가지, 그래도 엄만 네가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살기를 바라지 않아.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세상 안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의 70%는 널 위한 거야. 비행기표는 카드 할부로 사고, 다녀와서 엄마가 열심히 일하면 되지"


그리고 내친김에 사족도 달았다.


"엄마는 네가 외국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던져놓고 보니 과연 괜찮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그때쯤이면 아들 녀석은 나의 말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독일-프랑스 여행이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 앞에 던져졌다. 마치 하느님이 '오다 주웠다'하며 던져준 것 같았다. 츤데레 God~


아들은 유럽이 초행, 나는 독일이 초행. 그러나 구글맵과 숙박 어플은 과장 조금 보태서 우리를 독일이 익숙한 여행자처럼 만들었고, 눈치 보지 않고 미성년 아들과 식당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며 낄낄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로 미술관과 박물관이 우리의 탐방지였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미없었을 아들은 군말 없이 잘 쫓아와 주었고 열흘간의 여행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짜증 내는 일 없이 서로에게 잘 맞추었다.


저녁 식사 후 맥주타임을 더 갖고 싶은 나에 비해 얼른 숙소로 돌아가 스마트폰에 매진하고 싶은 아들은 그저 서로를 존중했다. 아들을 호텔로 데려다주고 나는 맥주 한 병을 들고 주변의 관광지를 조금 더 둘러보았다. 해가지는 마천루를 바라보며 앉아있거나, 거리악사들의 연주에 자유롭게 춤추는 이방인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오면 매번 아들은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왜 이리 늦게 오냐며 핀잔을 주곤 했다.

"걱정했잖아..."라는 말과 함께


짜디짠 독일의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모든 식당에서는 주문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음식을 먹는 시간보다 길었으며 겨우 그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도 계산을 하는 일은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우선인 자전거 도로를 멋모르고 걷다가 주의를 받기도 하고, 케밥을 파는 터키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우리의 주문을 놓쳤고, 버스와 전철은 티켓을 검사하는 시스템 없이 운행되었다.


파리행 비행기는 우리의 짐을 싣지 못한 채 드골 공항에 도착했고, 독일에 비해 살인적인 프랑스의 물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에어컨이 달린 좁디좁은 호텔도 감사하게 만들었다. 지하철 환승통로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연주는 낡은 메트로 플랫폼을 무대로 바꾸었고, 여행 내내 감정 표현을 절제하던 10대 남자아이도 밤의 에펠탑 앞에선 마음이 무너졌다.


몇 장의 셀카와 에펠탑 앞에서 흔들린 채 찍힌 아들과의 사진을 남기고 독일-프랑스 여행은 끝났다.





1년이 지난 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들, 엄마랑 또 여행 갈까? 이번엔 이탈리아, 아니면 스페인! 어디가 좋아?"


"이탈리아가 나을 듯..."


"엄마도 그런데~ 엄마랑 여행 가는 거 좋지?"


"..."


"왜 말이 없어?"


"엄마라면 좋겠어? 맨날 미술관만 가는데?"


"ㅎㅎㅎ 하긴 그래, 엄마라도 네 나이에 그런 여행은 재미없을 것 같아. 얼른 대학생 돼서 친구들이랑 여행 많이 다녀. 친구들이랑 가는 여행이 제일 재미있지(사실 나도 그렇거든)... 그래도 가끔은 엄마랑 같이 여행 다녀줄 거지?"


"응 그럴게..." 마지못해 하는 대답 같지만 아들의 핸드폰 배경화면엔 여전히 그때 찍은 에펠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25년 전, 내 생애 처음으로 갔던 프랑스, 에펠탑에 불이 타다닥 켜지는 그 순간에 기도를 했었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다시 오게 해 주세요라고.


츤데레 God! 내 기도를 20여 년이 넘게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너무 늦게 들어주신 게 쑥스러우셨나? 시크하게 갑자기 툭 던져주신걸 보니...


그리고 작은 기도 하나를 더 해본다. 부디 남편이 이 글을 안 보게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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