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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11. 2020

개인주의자의 물건들

1일 1글 시즌4 [episode 13]

나와 친한 선배 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주는 것을 좋아한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날씨가 좋으니까,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써 보니 좋아서..." 등등 이유도 많다.


비싸지는 않지만 아무데서나 살 수 없는 빵이라던지, 여행지의 느낌이 폴폴 나는 컵받침이나 마그네틱, 건강식품, 앙증맞은 장식품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 많은 물건들이 그녀의 손을 통해 건네 지면 세상 어떤 물건보다도 특별해진다. 그런 언니가 자신의 선물 아이템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칫솔과 자명종 시계라고 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시계 역할을 대신하니 벽시계는 물론 작은 자명종도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녀와 내가 20대이던 그 당시에는 알람 기능이 있는 작고 귀여운 탁상시계가 아침잠 많은 피곤한 청춘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그녀의 지론은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에는 얼추 비슷한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빼놓지 않는 것은 시계를 보는 일과 양치질을 하는 것. 그러니 자신이 칫솔과 자명종을 선물하면 아무래도 매일 아침마다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이 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결혼을 했을 때 언니가 준 선물은 한 귀퉁이 시계가 달린 커다란 영화 포스터 액자였다. 그걸 액자로 불러야 할지 시계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언니는 그 시계를 볼 때마다 자신을 생각해달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막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나에게 시계를 볼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하라니.... 지금 생각하니 언니는 욕심쟁이다. 훗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나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도 있고, 직접 돈을 주고 산 물건도 있고,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물건들도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 받은 선물이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물건들은 모두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침대 에 붙어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A bigger splash'포스터는 고등학교 절친인 K와 함께 시립미술관에서 구입한 기념품 그림이다. 나 때문에 같은 전시회를 두 번이나 보아야 했었던 친구와의 수다스런 그 날이 그림 속에 담겨있고, 창틀에 걸린 카멜색 토트백은 그것을 무척이나 탐내던 나에게 "언니 가질래?" 하며 쿨하게 패스 해준 동생이 담겨있다. 그 옆 서랍장에 걸쳐져 있는 연보라색 롱 니트는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한 여행에서 밤새 나누던 타로점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싼 값에 사두었다가 잊어버려서 그만 물러버릴 위기에 쳐했던 오이 세 개로 지금 막 만든 피클은 아들내미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학부모로 만났다가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J엄마를 떠오르게 한다. 무엇이든 나누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는 내게 동치미며 장아찌, 피클 등 자신이 만든 음식이나 고구마, 상추, 옥수수처럼 시댁에서 농사지은 것들을 한 짐 지고 와서는 툭 던져주곤 뭐 이리 많냐는 나의 행복한 잔소리에 친정엄마한테도 좀 나눠 드리라며 인심을 곤 했다.


이기적인 것이 아닌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는 나는 너무 깊고 친밀한 관계 나누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그래서 오래전 읽은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은 내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 다소 의심이 많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가장 중시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탓에 나는 조금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처럼 비치기도 할 것이다. 나와 타인의 영역을 구분하는 줄을 그어놓고 나도 넘지 않을 테니 너도 넘지 말라는 태도로 살아온 나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문득 들러본 나의 주변엔 온전히 나만의 물건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향한 관심과 호감, 함께 나눈 기쁨과 슬픔,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상대의 시간과 마음, 그것이 오롯이 담긴 수많은 물건들을 매일 바라보고 매만지고 함께 살아온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을 내 삶의 한 부분에 담고서 살아온 것이었다. 자만심 가득한 나의 마음이 물건들에 담긴 그들의 이야기와 마음을 애써 외면했을 뿐이었다.


내가 쌓은 편협하고 견고한 성의 한 귀퉁이가 푸르르 모래바람이 되어 날아갔다. 그 무너진 귀퉁이로 따뜻한 빛이 들어와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종이는 종이가 아닌 것(나무, 씨앗, 해, 비, 흙, 바람, 농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화엄경의 말처럼 나의 삶 또한 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글도 쓰지 못했을 터, 감사한 토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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