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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19. 2020

불 금, 달밤에 체조

1일 1글 시즌4 [episode 21]

매일 하나의 글을 쓴다. 아니 써야만 한다. 왜?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아는 온라인 상의 친구들은 나를 대단하다며 엄지척을 누르거나 하트를 선사한다.


그럴 때마다 사실 난 손발이 오그라들며 부끄러워진다. 

얼마나 실행력이 부족했으면 굳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온라인에 알리고, 혹여 누군가 보면서 '쯫쯫 그럴 줄 알았어, 또 작심삼일 이구만...'라고 흉볼까 바득 바득 그 일을 해내는 걸까?


사실 이 방법은 나에게 제대로 통한다. 그래서 늘 마음만 먹는 일들,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겠다든가 글을 써야겠다든가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든가 이런 일들을 생각만 하다가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매일 해야 할 일 목록'을 만들어 출력해 냉장고에 붙인다. 그다음부터는 그 일을 꼭 해야만 한다. 암묵적이지만 100일 정도 지속한다. 


금요일 저녁, 강릉에서 서울로 놀러 온 친구가 있어 인천 사는 친구 집에 모였다. 메로구이와 육회, 코다리 조림과 회,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선 코로나 때문에 겪은 어려움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여름휴가 이야기까지 수다에 수다를 더해가며 불금을 만들었다. 신바람 나는 시간을 즐기면서도 내 머리 한 구석엔 오늘 해야 할 그러나 아직 못한 운동 몇 개가 떠올랐다. 스쿼트 150개, 플랭크 1분씩 세 번... 그러니까 하루치 실내 운동을 아직 못한 것이었다. 


술을 마시다 말고 화장실을 갔다. 거기서 스쿼트 50개를 했다. 갑자기 술이 올라오며 얼굴이 벌게졌다. 숨도 찼다. 다시 술 상 앞에 앉았다. 술이 깼다. 마침 TV에서 요즘 장안의 화제라는 '부부의 세계'가 방송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터라 내심 궁금했었는데, 보는 내내 속이 터졌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을 백번 정도 외쳤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사실 드라마보다 실제 삶이 더 그러하다는 걸. 드라마 작가들은 결코 허구를 쓰지 않는다.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 대부분 경험하거나 수집한 진짜 인간의 삶을 드라마로 집필한다. (오늘은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구나... 초현실주의도 아니고...ㅋ)


남 주인공을 타도하던 한 친구의 외침은 어느새 '푸르르'하는 코골이 소리로 바뀌고, 술판이 시들해진 틈을 타 한쪽 구석에 가 남은 스쿼트 100개를 더 했다. 사실 조금 대충 했다. 그러면서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암! 그렇고 말고 하며 대인배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 


집을 내어준 친구의 딸내미 방에서 나와 강릉 친구가 자기로 한다. 친구는 바닥에 요를 깐 채 잠이 들었고 나는 2층 침대의 위칸으로 올라가 자야 한다. 그러나 아직 잘 수 없다. 플랭크 3회가 남았다. 핸드폰으로 설정된 1분 타이머를 켜놓고 잠든 친구 옆에서 플랭크를 시작한다. 30초가 지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특별히 정신을 차려야 한다. 1분이 되는 순간 알람이 울릴 테고 그러면 잠든 친구가 깰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넌 뭐햐냐? 달밤에 체조하냐? 집에서 안 하는 것들이 나오면 유난이야~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1분이 되어 알람이 울리기 전 59초에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한다. 무사히 플랭크 3회를 마쳤다. 


잘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하니까 오늘의 글 도 쓸 수 있었던 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았는가? 이왕이면 돕지만 말고 행운이나 대박 같은 거 왕창 내려주시지, 좀 짠 경향이 있으신 듯! 하지만 세상에 공짜 없다는 게 내 인생 지론이니까 그냥 좀 도와만 주는 것도 OK!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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