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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02. 2020

고스톱이 아니라 공공칠빵

1일 1글 시즌4  [ episode 34]

25년 전쯤이었을까? 나와 친구, 이렇게 둘이서 터키와 주변의 몇 개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터키에 도착했을 때는 9월의 어느 날, 여행의 말미였다. 당시에 터키에는 한국 여행객이 별로 없었을 때였고 게다가 비수기였던 터라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우리는 한국 사람이 그리웠다. 한국말로 떠는 수다가 고팠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터키에 파견근무 나와있는 여섯 명의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모 엘리베이터 회사의 직원들이었는데, 우리보다 대 여섯 살이 많았던 그들은 마침 며칠간의 휴가 덕분에 앙카라의 명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잡아당기듯 서로 "혹시....?"라고 물었고 한국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마침내 응답받듯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 여기서 한국사람을 보네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앙카라의 중심부에 있는 이름 모를 광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밤하늘의 달이 크고 둥글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날이 한국의 추석이란 사실이었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모두가 그랬다.


터키라는 이국의 땅에서 한국인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우리는 한국의 대명절인 추석을 기념하기 위해  가로등도 없어 어두컴컴한 광장의 중앙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한국을, 추석을 기념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열었다.


그것은 바로 공! 공! 칠! 빵!


당연한 것이지만 매우 한국적인 외모의 아저씨(지금 생각해보면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매우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땐 아저씨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들과 고작 한국말 이래 봤자 '공', '칠', '빵', '으악'이 다였던 그 시간은  '한국인과 한국 말하기'라는 다소 난감한 우리의 바람을 팔월 한가위 보름달 매직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기똥찬 순간이었다.


공공칠빵! 으악! 하는 소리, 잠시 후 까르르 하며 몇 명은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혹은 옆으로 쓰러지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멀찌감치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우리를 구경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목도 아프고 배도 아픈 상태가 되어 급기야 '침묵의 공공칠빵'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게임을 진행했다.


휘영청 둥근 보름달 아래서 8명의 한국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누가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갑자기 두 사람이 양팔을 번쩍 들더니 이내 다시 한 손가락을 누군가에게 들이댄다. 그러다 갑자기 세 명이 양 손을 번쩍 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순간 망연자실하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멋쩍은 웃음을 짓는 사람을 우리는 원 안으로 끌고 나와 엎드리게 한 후 다 함께 그의 등을 이상한 리듬에 맞춰 두들기다 마지막 스매싱으로 마무리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기가 막히게 박자를 맞추어 등짝 스매싱을 하던 우리를 바라보는 터키 사람들!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장엔 가로등이 없어 어두웠지만 하늘의 달이 매우 밝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터키 사람들의 표정이 얼핏 얼핏 보였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어이없을 때 짓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그때 그분들은 모두 다 잘 살고 계시겠지? 함께 여행했던 그 친구도 이제는 연락이 끊겼지만 그들 모두 내 마음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살고 있다. 우연히라도 이 글을 그때의 누군가가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그 즐거운 추억을 나누며 다시 한번 행복할텐데...


아무튼 그래서 나에게 추석은 '고스톱'이 아니라 '공공칠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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