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정 May 18. 2020

와인을 영접하듯, 그림도

1일 1글 시즌4 [episode 50]

(지난 포스팅의 일부를 수정하여 다시 작성)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독주를 잘 못 마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맥주의 쌉싸름한 맛과 시원한 목 넘김이 스트레스 해소에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맥주를 즐긴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 맥주를 조금씩 즐겼고, 우리나라 맥주의 양대산맥 '하이트'와 '카스'의 시대를 지나 전 세계의 맥주를 국내의 슈퍼마켓 어디에서나 살 수 있게 된 지금 각각의 맥주가 가진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며 그 즐거움은 배가되고 있다. 그 사이 특별히 선호하는 맥주가 생겼고 상황에 따라 맥주를 선택해 마시기도 하며 여행을 가면 그 맥주의 생산지를 찾아가는 일도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2005년에 연재를 시작해 무려 10년간 발간되며 인기를 끌었던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가 있다. 맥주 회사 영업 사원인 주인공 시즈쿠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12 사도'라 불리는 12병의 와인과 '신의 물방울'이라고 불리는 1병의 와인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국내에서 250 만부, 전 세계적으로는 2천만 부 이상 팔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원작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다는데 와인에 관심 없던 수많은 일반인들을 와인의 세계로 입문시킨 공이 크니 와인 종주국에서 환호할 만하다. 맥주를 즐기던 나 또한 어설프게나마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즈쿠가 와인을 마실 때마다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와인을 맛보는 순간 어떤 와인은 시즈쿠를 해바라기 밭에 데려다 놓는다.


“해바라기 밭이다. 태양을 듬뿍 쬔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피어있어. 어딘가 그리운 향수를 자아내는 석양에 물든 해바라기 밭 속에 나는 지금 서 있다. 그리고 천천히 저무는 커다란 태양. 놀라울 정도의 화려함, 놀라울 정도의 풍요로움과 거기에 플럼, 초콜릿, 볶은 너츠의 향기, 말린 풀, 클로브 등의 스파이스, 그러한 것들을 응축한 농축액 같은 근사한 복잡함


이라고 외치는 시즈쿠, 또 어떤 와인은 그를 깊은 밤 속으로 안내한다.


“강렬한 열기와 울려 퍼지는 악기 소리, 그리고 도취되게 만드는 목소리, 달콤하고 관능적인 에스닉 향이 떠다니는 깊은 밤”


이라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이쯤 되다 보니 와인 한 잔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나만 모르고 있었나 싶어 열심히 와인 모임을 쫓아다니며 와인을 영접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열고 감각을 벼리며 와인을 마셔도 그 어떤 세상도 열리지 않았다. '아아... 만화책에서 과장해 표현한 그 감정을 어찌 현실세계에서 찾으려 했나, 바보같이...'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일부 와인 전문가들은 몇몇의 와인의 경우 만화의 표현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어 작가의 표현력을 귀신같다고 평하기도 하였단다. 그런데 나는 왜 아무런 느낌이 없지? 와인은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나 보다라며 관심을 끊으려 했다.  그러다 우연히 와인 클래스에 참석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아는 만큼 보이고,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내가 맥주를 즐기게 된 것처럼 와인을 즐기는 일도 관심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림을 만나는 일도 비슷하다. 누군가가 어떤 그림을 보고 이러이러하게 느꼈다고 해서 나 또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똑같은 느낌을 받을 필요가 없다. 느낌이 없으면 없는 데로, 있으면 있는 데로 나의 느낌을 존중하면 된다.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알아가며 시간을 들여 자주 만나는 방법이 좋다. 처음엔 내가 무슨 그림을 좋아하는지 왜 그 그림이 맘에 드는지 모른다. 자주 보고 음미하고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다양한 시대, 화가, 화풍의 그림들을 두루두루 만나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림이 언제 내게 말을 걸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먼저 그림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새 학기가 되어 처음 본 친구들 사이에 앉아있는 며칠의 시간이 얼마나 불편한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럴 때 어떤 친구가 말을 먼저 걸어와 주면 얼마나 고마운가? 훨씬 빨리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그림에게 먼저 말을 거는 친구가 되어보자. 그림과 훨씬 빨리 가까워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