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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07. 2018

새까만 아그리파

살롱 드 꺄레와 에꼴 데 보자르

내 나이 15살,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등록한 화실에서 맨 처음 그리게 된것은 난생 처음 본 먼 나라의 장군 '아그리파'였다. 하루 이틀 선긋기 연습을 시키던 원장님은 갑자기 한쪽 벽면에 즐비하게 놓인 석고상들 앞에 날 앉히시더니 그중 제일 작고 단순해 보이는 남자의 두상을 가리키며 그려보라고 했다. 그리곤 그 석고상 이름이 아그리파라는 짤막한 말만 내 뒤통수에 붙여놓으시곤 다른 학생들에게 가 버리셨다.


하얀색의 석고상을 하얀 2절 켄트지위에 연필로 그려야 하다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지만 뭐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3시간 남짓 분주하게 팔을 움직였다. 여자 중학교를 1년 다니다가 전학온 학교가 남녀 공학이긴 했지만 남학생반 여학생반이 나누어져 있었기에 어떤 남자의 얼굴을 3시간 넘게 쳐다본건 처음이었다.


뭘 할 줄 모를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밖에 없지 않은가. 팔이 떨어져 나갈것 같다고 느낄 때 즈음 4B 연필은 어느새 삼분의 일이 닳아 있었고 이윽고 원장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수정아! 이제 그만 그리고 잠시 뒤로 나와볼래?"


감옥 아닌 감옥에서 풀려나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뒤로 서너 걸음 움직였다.

묘한 미소를 짓고 계신 원장님 옆에 엉거주춤 선 나는 가까이에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화판 위 신세계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하얀 석고의 밝고 어두운 명암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내 그림속의 아그리파는 마치 원래가 청동 조각인 듯 새까맣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불꺼진 공간에 있는 청동조각상말이다.


유치원 때부터 그림 신동이라 불려졌던 나. 웬만한 교내 미술대회의 상은 휩쓸었고, 사생대회에 나가서 돗자리 깔고 그림이라도 그릴라 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머~ 이 꼬마 좀 봐! 웬일이니! 엄청 잘 그리네!"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생전 처음 본 남자의 하얀 얼굴을 연탄처럼 새까맣게 그려놓고 말았으니 자존심이 마구 구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원장님께선 처음 치곤 잘 그렸네 하며 웃으셨지만 나는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적어도 그림 만큼은... 그런 자괴감과 함께 도대체 이런 '석고상 그리기'는 누가 만들어 놓은거야?라는 불만의 외침이 머리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 망신스러운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생각보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년 전도 아니고 100년 전도 아닌 370년 전이다. 루이 14세가 열 살이 되던 1648년에 프랑스에 왕립 미술아카데미가 세워졌다. 아카데미의 회원은 프랑스 미술계에서 핵심 멤버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엄격하게 제한된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또한 이 아카데미의 유명 교수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수습생들만이 아카데미 부설 미술학교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창립 기념으로 개최한 전시회에서 시작되어 이후 명맥을 이어온 이 전시회를 살롱전(Salon of paris)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전시 장소가 루브르의 정사각형 건물인 살롱 꺄레(사각형의 방)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파리 살롱전은 제도권 미술세계에 진입하는 최고의 관문이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1867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기까지 여섯 번이나 자격심사에 떨어졌고,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 또한 평생 동안 살롱전에 입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네, 르누아르와 수없이 많은 화가들이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낙방하고 다시 출품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왕립미술아카데미의 회원이 되기 전 살롱전에 6번이나 낙방했다.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면 학생들은 맨 처음 고대의 조각상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를 판화본으로 보면서 모사하여 윤곽선과 명암법 등을 익힌다. 다음 단계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드로잉 심사에서 통과해야 한다. 통과한 사람만이 고대 조각의 석고상을 보고 모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또 이 단계를 통과해야 실제 누드모델을 그릴 수 있게 된다. 1863년까지 에꼴 데 보자르에서는 채색은 전혀 가르치치 않았고 오직 드로잉만 가르쳤다. 이렇게 단계별로 진급한 후 최고의 학생에게 주는 상은 '로마상'인데 로마에 개설한 아카데미에서 5년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최종 심사가 남는데, 이 심사를 통해 어떤 분야의 화가가 될지 결정되었다. 가장 높은 수준은 역사화가였고 그 뒤로 초상화, 장르화, 정물화, 풍경화 순이었다.


살롱전은 19세기까지 매 해 어마어마한 인파를 동원했고 수없이 많은 화제를 낳았던 서양미술의 최대 이벤트였다.


1787년 살롱전의 모습



살롱전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살롱전 출품 여부에 따라 화가의 등급이 매겨졌고, 그들은 경쟁적으로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자 했다. 근대 화가들의 일대기를 보면 거의 대부분 살롱전 출품을 위해 노력한 일화들이 많다. 지난 '프레데리끄 바지유'에 관한 글에서도 살롱전에 낙방한 르누아르와 모네를 위로하기 위해 바지유가 그들의 그림을 구입해 준 일이 있지 않았나. (https://brunch.co.kr/@insightraveler/28)


아카데미가 주관한 살롱전은 미술사에 많은 의미를 남겼다. 아카데미즘은 오랜 시간 프랑스와 유럽화가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거대한 룰이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아카데미즘은 미술의 발전을 저해한 경직된 미술사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인상주의 이후에 생겨난 많은 미술사조들은 아카데미즘 미술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들이 아닌가?


아카데미즘이 전통을 중시하고 안정된 구도와 역사적인 주제와 가치관, 원근법등 규칙을 정확히 지킨 묘사로 고리타분하고 격식을 차리는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차단하는 미술이라고 공격받을지라도 수없이 많은 화가들이 고민하고 넘어서야 할 벽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철학과 기법을 부단히 강구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임엔 틀림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미술대학 입시를 위해 받았던 교육방식은 프랑스 아카데미를 모방한 일본 화단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다. 아그리파와 쥴리앙, 비너스와 헤르메스를 처음 만났던 15살의 소녀. 아무것도 몰랐던 대한민국의 소녀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서양미술의 중심에서 이루어졌던 교육방식을 사소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흥분감마저 든다.


아그리파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자 후에 사위가 된 인물이라고 한다. 2000년 후에 자신의 얼굴을 숯검댕이로 그려놓은 대한민국의 여중생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허허' 하고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빨리-많이-대충 에서 천천히-깊게-대화하는 여행을 만들어주는... 그림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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