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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호 Apr 19. 2023

[마음 1] 나는 하루에 두 번 몹시 나쁜 사람이 된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고 싶은 마음

현대인에게 지하철은 양면의 동전 같은 존재다. 저렴한 비용에 수도권 각지를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라는 점에선 아주 훌륭하다. 날씨나 교통체증 같은 변수에도 영향을 적게 받으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면 깨닫게 된다. 세상에 작은 지옥이 있다면 바로 지하철이 틀림없으리라는 사실을.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혼란의 구렁텅이다.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르르 쏟아져 나와 뱀처럼 긴 행렬을 형성한 인파를 보고 있자면 뜨악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만 봐도 기가 빨리는, MBTI로 따지면 극단적인 I형 인간이다(검사 결과 I 수치가 무려 87%였다). 때문에 부러 출근시간보다 30분 일찍 길을 나서곤 하지만, 이른 시간이라도 출근 시간이라고 바글대는 사람들을 어김없이 마주하게 된다.       


개찰구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나는 자못 비장해진다. ‘전역 출발’이라는 열차 상태를 확인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다. 최소한 ‘전전역 도착’은 되어야 마음이 편하다. 열차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주변의 동태를 민감하게 의식한다. 옆 사람 걸음이 빨라진다 싶으면 나도 떠밀리듯 속도를 높인다. 에스컬레이터가 혼잡할 땐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가듯 올라간다. 승강장에 도착하면 휠체어석이 없는, 다시 말해 좌석으로만 구성된 승차홈 중 가장 줄이 짧은 곳을 신속하게 탐색한다. 머잖아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내 출근길의 기분이 순식간에 판가름 난다. 대부분은 이렇다. 아, 오늘도 글렀네.      


놀라운 전개는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에 앉아서 가길 바란다는 건 봄날의 눈을 소망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실상 헛된 희망이라는 뜻이다. 복작대는 열차에 올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서서 내 앞사람이 가장 근접한 환승역에서 하차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평일 아침 내 출근길의 루틴이다. 우습게도 가끔은 속으로 주문을 외기도 한다. ‘빨리 내려 주세요, 다음 환승역에서 제발 내려 주세요’ 하고.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던 시기도 있었다. 앉아가는 게 뭐라고 아등바등 탐욕스럽게 집착하나 싶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체화하면서 마음은 서서히 바뀌었다. 정말로 앉지 않으면 까무러질 것 같은 적이 일주일에 두어 번 꼴로는 있었으니까. 더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는 보란 듯이 당당해졌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초식동물의 탈을 쓴 맹수나 다름없다. 다들 짐짓 의연한 체하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깔고 있지만,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앞사람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만 해도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것만 같다.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며 늘 사냥 대기 상태인 직장인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큼 뻔뻔해져야 하니까. 한 칸의 자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우리네 모습은 그렇게 당연해졌다. 그래, 그런 줄 알았다.


지금 사는 집에서 회사에 출근하려면 이촌역을 지나야 한다. 그즈음엔 차창 밖으로 한강뷰가 펼쳐지는데, 풍경이 퍽 근사해 나는 그때마다 책이나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고 바깥을 바라보곤 한다. 옅게 반짝이는 윤슬과 저만치 우듬지를 이룬 마천루 너머로 동이 트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자면 답답했던 지하철 공기가 조금이나마 환기되는 기분이다.    

  

지하철 한 칸은 단순한 자리가 아니며,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된 좁디좁은 행복의 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한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기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서울 중심에 터를 잡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상상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지하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되는 삶을.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불안감이 덮쳤다. 지하철 한 칸은 단순한 자리가 아니며,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된 좁디좁은 행복의 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잖아 열차는 어둠 속으로 들어섰고, 사람들의 얼굴 위론 햇살 대신 푸른 휴대폰 화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후 계속해서 그날의 기분을 곱씹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지하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결국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서울 변두리 혹은 경기도에 거주하고 자차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잠을 줄여야만 하는 사람들. 물론 개인별 조건은 상이하겠으나 소시민이라는 공통분모는 더러 적용될 터였다.


지하철 한 칸이라는 화두로 부의 불균형이나 비효율적인 지하철 시스템을 비판하고픈 생각은 없다.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닌 사람들을 시기하고픈 마음은 더더욱 없고. 피해망상이나 자의식 과잉으로 범벅이 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다. 그들 중 대개는 그들의 삶을 열심히 살았고, 덕분에 지하철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 테며, 삶을 영위하고자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선 서울 바깥의 사람들과는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직장인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일과 중 ‘행복하다’고 느낄 만한 순간은 드문 반면 ‘행복하지 않다’고 울적해지는 때는 수두룩하다. 나의 경우 취재 섭외나 기사 작성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사람들과 상대하느라 감정 소모를 해야 할 때 그렇다. 행복하다고 느낄 만한 순간이 있다면 지하철에서 잠시나마 고된 몸을 뉘일 수 있을 때 정도다. 그래서 늘 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정말로 지하철 한 칸이 누군가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복이라면, 그것을 타인에게서 빼앗고자 하는 행위란 얼마나 볼품없는가. 하루에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말이다.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힘들게 살아간다는 점에선 모두가 동등하고 지하철 자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이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무조건 양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욕심낼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굳이 거기에 ‘행복’을 추가할 필요가 있을까. 타인의 행복으로 말미암아 내가 불행해지고, 해서 나는 내 몫의 행복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삶의 윤택을 갉아먹는 해충인 것만 같다.


돌이켜 보면 행복할 수 없었던 날의 나는 무척이나 예민해지고 감정적으로 불안해졌다. 한껏 시무룩한 마음으로 퇴근길에 올라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 보면 세상마저 나를 외면한다는 슬픔이 차올랐다. 힘을 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리는 날의 고독감, 헛헛함, 절망감이 한 번 스미고 나면 캄캄한 밤 파도 위의 배처럼 나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럴 때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등대처럼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고마운 빛이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지친 몸을 뉘어 마음 편히 한숨 자고 일어나라고 격려해 주는 듯했다.    

   

건조하고 까칠한 세상에 단비가 되어주는 이유 없는 것들을 애정한다. 이유 없는 사치, 이유 없는 사색, 이유 없는 게으름. 그중에 최고는 이유 없는 배려와 친절이 아닐지. 세상은 그런 이유 없음으로 인해 다정한 연대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다. 누구도 온전히 혼자가 되도록 세상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다시 한번 믿어볼 수 있다.      


며칠 전엔 무심코 하차역 몇 정거장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탓이다. 내 자리는 금세 다른 이로 채워졌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나의 자리 비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는 감각은 잠깐의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들었다. 최근 한두 정거장 전에 미리 자리를 비워주자는 원칙을 마음에 새겨둔 까닭이다. 물론 매번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노력만 한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가끔은 충분한 것 이상의 과분한 배려와 친절이 필요한 세상이기도 하니까.      


한 번은 한 아이가 내 옆에 앉아 있었고, 아빠로 보이는 사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아이가 무어라 말을 우물거릴 때마다 허리를 숙여 다정하게 귀 기울여 주곤 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출입구 쪽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마음을 보고서야 어쩐지 안심했다. 자신이 받은 배려를 당사자는 인지조차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어떠한가. 내가 알고, 내 마음이 안다.


어쩌다 허락된 한 칸에선 결국 몸을 일으켜야 한다. 자리를 비우고 나면 길 위의 내게 허락된 공간은 없다. 우리는 한 칸을 위해 다시금 싸울 것이다. 애처롭게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그런 우리를 다정한 온도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 2022.09




마음 생태보고서



수심: ●○○○○




이 우주는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무심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존재는 공명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다산초당 펴냄)』 275p




한없이 부족한 나를 위로하는 노래

1. 동그라미 - 최유리

2. 터벅터벅 - 민서

3. 미운 나 - 어반자카파

4. Why Am I Like This - Orla Gartland

5. Anti-hero - Taylor Sw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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