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브니어 Dave Near Jul 30. 2016

고독과 거리가 멀어진 나를 발견한다.

홀로 있는 시간의 위대함, 그리고 회복을 향한 갈망

고독과 거리가 멀어진 나를 발견한다. 한 때는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썼던 것 같은데, 자꾸만 고독을 회피한다. 왜일까.


고독은 언제나 내게 모든 것의 원천이었다. 불꺼진 예배당에 놓여진 피아노를 치면서 보낸 학창시절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거리를 걷고, 모르는 사람과 섞여 도서관과 서점을 다니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내 안에서 말하는 바를 내가 직접 듣고 되뇌이고 다시 상기하고 각인시키는 일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고독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부모가 소원해졌고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고 어머니의 목회는 이제 시작이었다. 삶의 여러 굴곡을 겪는 부모님 밑에서 내 삶도 소용돌이쳤다. 할머니 손에 거의 키워지다시피 한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독한 광야'였다. 형제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이 살아야 했다. 지혜로운 할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지만 밥짓고 빨래하고 학교보내주시는 것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난의 기억은 고독과 맞물려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악바리 같은 증오심이나 적개심 혹은 오기를 발동시키지 않았던 것을 신에게 늘 감사한다.


고독의 환경 가운데 나는 음악과 책과 산책과 가까워졌고 별을 사랑하고 어둔 길 가로등을 좋아하는 소년이 되었다. 고독은 언제나 나의 친구요, 내가 신을 향해 더욱 사랑을 구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길이었고, 내가 노래하는 이유였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거기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 혼자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울고 웃었던 노래들. 그런 감각들이 내 안에 깊이 베어있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의 흐름 속에 자꾸만 고독을 잃어간다. 그 고독을 잃어간다는 건 거의 나 자신을 잃는 것과 다름없음에도 고독과 직면하고 맞딱뜨리기 싫어한다. 그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조만간 심각한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감을 느낀다.


요즘 노래들을 만들면서 멜로디는 조금 더 대중적으로 의도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가사를 나만의 것으로, 단단하고 또 확실한 가사를 쓰는 것이 너무 어렵다. 고독을 잃어버리니 나를 잃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말할 꺼리와 주장할 꺼리를 잃어버렸다. 선명하게 붙들고 있던 것들이 있는데 흘리고 흘려서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느낌마저 든다. 가사 속에 살아 숨쉬던 섬세함과 직관들이 나름 빛난다고 생각했는데 다소 자신감이 떨어진다. 원인은, 다시 돌아와서 고독의 확보만이 살길이다.


작가의 이전글 늦지 않았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