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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yuun Nov 19. 2022

건축스토리텔링과 UX 프로세스

모든 훌륭한 건축물에는 스토리가 있다


최근 학교에서 유현준 건축가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기억에 남는 내용은 건축이 사람의 생각을 강화하고 태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여 상호작용을 시키고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든다는 점이었다. 뉴욕 같은 문화 선진 도시들의 특징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기 쉽고 교류를 많이 일으키는 공간을 많이 배치한다는 점이다. 공공 공간에 벤치나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광장 같은 것들이 바로 떠오르는 예시가 된다.


좋은 건축은 건물 자체를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일어날 일, 사람들의 교류를 위한 프로그램, 창의적 아이디어들이 생겨날 가능성을 제시한다. 결국 도시의 번성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나 공공장소의 활성화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일에는 그만큼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건축도 UX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UX 프로세스와 앞단의 기획적인 부분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얼마 전에 본 테드 토크에서도 비슷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OMA 건축사무소의 Ole Scheeren은 베이징 CCTV 빌딩 설계 과정을 설명하며 훌륭한 건축에는 스토리텔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좋은 기획에는 스토리텔링 요소가 들어간다.


Form Follows Function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지난 100년간 모던 디자인과 건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념을 언급하며 강연을 시작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필요한 기능과 구조에 맞추어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빠른 산업화 시대에 적합했던 효율 중심적 사고였다. 이로 인해 많은 건축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기능에 충실한 실용적인 형태로 디자인되어왔다.


형태는 이야기를 따른다


하지만 이와 조금은 다르게, 스위스의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는 '형태는 이야기를 따른다(Form Follows Fiction)'고 주장했다. 기능은 물론 중요하지만 기능을 생각하기 전 알아야 할 것이 사람과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즉 문화, 역사 같은 부분들이라는 것이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서구권 서민층의 집에는 복도가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중요해지며 그때서야 건물에 복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은 건축적 아이디어이기 전에 인간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진 문화적 아이디어이며, 그런 니즈로부터 생겨난 기능이 바로 복도라는 물리적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http://www.kjarrett.com/livinginthepast/2014/12/12/living-in-the-early-modern-past-the-17th-century-


건축은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 베르나르 추미 (출처)


형태는 이야기 (픽션)을 따른다는 프레임에서 본다면 건축과 건물은 서사의 공간이며, 서사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그 건물에 살거나 일하거나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게 되며, 건축가들은 특정 형태를 생각하기 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경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베이징 CCTV 본사 건물을 설계 의뢰를 받았을 때도 어떻게 하면 스토리로 공간의 형태를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세워질 곳은 베이징 도심의 비즈니스 중심구역이었으며, 당시엔 아직 세워지지 않았지만 그 주변은 모두 비슷하게 생긴 높은 고층빌딩들이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이 세워질 지역적 맥락을 당시에 정확하게 상상할 순 없었지만 확실한 건 주변에 스카이스크레이퍼들이 아주 많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국영 방송사인만큼 도시를 상징하게 될 가능성도 높고 주변에 고층빌딩이 빼곡할 것이란 전제하에, OMA에서도 무조건 높게 짓는 단편적 솔루션을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생각을 뒤집어서 스케일 큰 건물이 무조건 높아야 할까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높은 건물이 주는 상징적 위계질서를 버리고, 고립 대신 협업을 원활하게 하는 시스템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협업이란 키워드를 생각하며 높게 솟은 일반적 건물의 수직 구조를 꺾어서 스스로 loop를 만들어낸 형태의 순환형 구조를 만들었다.

뉴스, 프로그램 제작, 방송, 리서치, 행정 등 방송사의 다양한 역할을 한데 모아 다양한 상호작용이 순환될 수 있는 구조로,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이 서로 협업하고 교류할 수 있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도 스케일이 매우 큰 건물이어서 실제로 이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경험이 어떨지 가늠이 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게 될 사람들의 경험을 설계하고 그러한 경험적 가치를 잘 전달하기 위해 방송국 건물에서 생활할 5명의 퍼소나도 만들었다고 한다.



퍼소나들이 이 빌딩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는 어떻게 흘러갈지, 그들이 서로 만나는 장소는 어디고 무엇을 경험할지에 대한 스토리를 제시했다. 내부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시설에 대한 설계 진행에 앞서 휴먼 스케일에서 어떻게 경험할지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하며 디자인을 진행시켰다고 한다. 10,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에서의 일상적 경험을 상상하긴 어렵지만 이렇게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간을 상상해보면 경험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 같다.


CCTV 빌딩 설계 과정과 생생한 공사현장을 보여준 뉴욕 moma 전시


이렇게 지어진 CCTV 건물은 이제 베이징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고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중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에서도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건물일 것으로 예상된다.


저 건물이 막 지어지고 있을 시기에 난 베이징에서 살고 있었지만 시내에 나갈 일 없는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거대한 건물이 도심에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알았다 해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 UX를 공부하게 된 지금 이 시점에 저 건물의 스토리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찾아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 건물을 중국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었을 것 같다. 외관이 매우 독특한 것도 있지만, 건물의 역할과 쓰임, 건물 안 또는 주변에서 생활할 사람들의 맥락을 고려해 설계했고 '협업'이라는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저런 형태도 도출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단순히 건축물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심의 상징으로, 문화적 아이콘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담는 무대로 인식이 될 수 있었던 건 '기능'이 아닌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건축가는 설명한다.



2007-The Year Beijing Blew up


2008년의 한 잡지 커버를 보면 건물을 둘러싼 사람들은 유명한 인물들이기도 하고, 경찰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포착돼있다.


건축이 다양한 이야기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비전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서비스의 사용자 경험에서도 서비스의 피처나 기능을 생각하기 전 사람들을 둘러싼 상황과 맥락,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어떤 경험과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기능에 대한 정의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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