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단편소설 안나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도망치듯 동유럽 여행을 떠났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풍경들은 아름다웠지만 또 그렇게까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있었다.
도망치듯 여행을 선택하고, 압도당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헛헛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항상 떠나고 싶어했던 날들도 있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아서 가능한 먼 곳으로, 가능한 길게.
7월 바르셀로나행을 앞둔 동생이 제주도로 사라진 지난 주말
아빠에게 "은경이는 요새 어디 안가네, 올해는 어디 안가?"라는 소리를 듣고
여행, 아니 떠남에 대한 갈망이 전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올해의 다짐 중 하나가 나를 돌보고, 일상을 단정하게 가꾸는 것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마음은 바쁘지 않게 지내고 싶었다.
정시퇴근을 사수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자주 매트 위에 앉고,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읽고 연주 하고,
책을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금새 지나가버릴 계절을 가능한 즐길 수 있도록 한철의 꽃과 찰나의 하늘에 마음을 내어주려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일상이 단단해졌다.
그러다보니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이 옅어졌다.
누군가 말했듯,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면 나의 여행은 요가 매트 위나 피아노 앞, 그리고 다정한 이의 옆자리다.
지금 나는 아주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