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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6. 2020

기분이 좋아지는 시 읽기

기분이 잔뜩 구겨졌다. 구겨졌다는 표현조차도 고상하다. 

잡쳤다. 

기분 좋은 수련을 방금 마쳤는데. 보통 기분이 가라앉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몸을 움직이는 거다. 이미 잔뜩 노곤해진 몸으론 무얼 해야할까?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시간엔 무얼 해야할까? 요가나 걷기가 아니라면, 그 다음 선택지는 방청소나 독서? 이런 기분엔 눈에 글자도 잘 안 들어온다. 달래줄 책을 찾기도 어렵다. 이책, 저책을 읽다 던져 버린다. 


요즘 이런 기분엔 시집을 읽는다. 밀란 쿤데라는 은유의 무서움에 대해 경고했지만, 마음을 달래줄 적확한 단어/문장을 찾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어느날, 요가를 하고 나온 뒤 망가진 기분은 최승자가 달래주었다. 

최승자,시집  <이 시대의 사랑> 중 '올 여름의 인생 공부'

묘비처럼 외로웠다는 문장을 본 순간 찌릿, 했다. 시간이 잠 속에 떨어져내려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는 장면도 눈에 선했다. 제목도 좋다.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오늘의 구원은 허수경이다.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중 '정든 병'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정들 것이 없어 하필 병에 정들어 버린 마음. 내몸이 상할 걸 알면서도 대책없이. 


혹 내가 묘비처럼 외로웠나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덧붙이자면. 내 기분을 적확하게 묘사해 마음을 달래준다는 것은 아니고, 어떤 기분이나 상태,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파스칼 키냐르식으로 한다면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를 찾아 그것에 기어코 이름을 붙이는 작업물을 볼 때의 짜릿한 쾌감이 마음을 달래준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따라 가기엔 마음이 너무 벅찬 상태이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엔 마음이 너무 번잡스러우니까. 


시는 다른 장르의 문학처럼 한 권의 책을 한 번에 다 읽기 어렵다. 쓰기 어렵고, 읽기 어려워 많이 나오지도 않지만, 어렵사리 나온 책들이 많이 팔리지도 않는다. 사람 좋은 함민복 시인은 <긍정적인 밥>에서 시 한 편과 시집 한 권의 가격이 박하다고 생각하다가 같은 가격의 따뜻한 국밥을 떠올리며, 본인의 시가 국밥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덥혀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푸른 바다처럼 너른 마음으로 고쳐 먹는다. 그때 시집 한 권의 가격은 삼천 원이었다. 지금은 세 배가 올라 구천 원 정도지만 여전히 턱없이 싸다. 


시인들이 부자가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행복, 슬픔, 불안, 질투, 환희. 온갖 감정들을 그들의 언어로 다시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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