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부산 가족여행
올 겨울은 참 힘들었다. 20년 가까이 농부로 산 남편의 한 숨이 깊었던 해이기도 했다. 하우스 농사는 노지 농사에 비해 계절의 변화에 둔감한 편이지만 지난 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서 파프리카 열매들이 물러졌고 올 겨울엔 너무 추워서 난방비 폭탄을 맞아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계절에 맞는 기후를 예상하며 농사를 짓던 시대는 이제 끝나지 않았나 싶다. 예측 불가능한 기후의 변화는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계속 농사를 짓는 것이 맞을까 고민하는 남편에게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위로하며 부산 여행을 제안했다. 쉼 없이 달려온 가장과 방학 내내 집에서만 지낸 아이들에게 바다 보러 가자는 말은 설렘 자체였다.
일 년에 한번 갈까 말까한 여행이지만 어딜 가든지 늘 남편이 운전을 도맡아 해왔는데 이번에는 기차와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하는 2박3일 부산패키지 여행이라 운전에 대한 부담 없이 모두가 함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부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다양한 체험도 했지만 역시 패키지여행은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쉬이 피곤해진다.
2박3일의 여행 중 둘째 날은 다행스럽게도 우리끼리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박한 호텔 조식을 든든히 먹고 10분 정도 걸어서 해운대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바다다!” 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맛없는 조식으로 심드렁했던 아이들은 바다를 보는 순간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며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해운대 바다야.” “와~ 넓다.” “물 색깔 봐. 너무 이쁘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며 일렁대고 있었다. 먼 바다 물결은 옅은 에메랄드 빛으로 가까운 바다는 사파이어 빛으로 넘실대며 여행자들을 반겼다. 맑고 투명한 물빛은 청량감을 주었고 전날의 묵은 피로를 싹 씻어 주었다.
우리 가족은 돗자리도 없이 해수욕장 계단 한쪽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서로 말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만 바라보았다. 가까웠다 멀어지는 파도는 제법 큰 소리로 철썩댔고 물살이 꽤 센 듯 보였다. 고운 모래로 가득 찬 백사장은 넓고 길었으며 모래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흰 눈뭉치 무더기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부산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저건 뭐지 하며 가까이 가보니 수백 마리의 하얀 갈매기 무리였다. 이 갈매기 떼는 앞 뒤 옆으로 레이더를 돌려가며 여행자들에게 먹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방송이 연신 나오고 있어서 목적 달성은 어려울 듯싶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졌고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후 무작정 바다로 달려 나갔다. 바닷물이 아직 차가우니 들어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듯 저희들끼리 파도 위에서 첨벙댔다. 차갑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깔깔대며 서로 물장난을 쳐대는 모습이 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슬며시 양말을 벗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은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포근한 날씨 덕분에 모래가 미지근했다. 고운 모래가 발등과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남편과 나란히 해변을 따라 쭉 걸었다.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빨리 걸을 수는 없었지만 물컹하고 서벅거리는 감촉이 싫지 않았다. 파도에 쓸려온 바닷물은 심장을 쫄깃하게 할 만큼 차가웠고 반복되는 파도소리는 귀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걱정이 많던 남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다에 마음을 맡긴 듯 편안해 보였다.
아이들은 물장난도 싫증이 났는지 모래성을 쌓다가 부수기를 반복하다가 모래 바닥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햇볕이 따가워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이불이 필요 없을 만큼 따뜻한 날씨 덕에 일광욕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우리 옆의 외국인 커플도 모래 위에 간이 의자를 놓고 한참 동안 바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가 되자 해변에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월요일임에도 다양한 국가에서 온 관광객들로 해운대는 시끌벅적 생기가 넘쳤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즐거운 추억 행복한 기억 많이 만들고 가세요~ 가족들과 내내 행복 하세요~
겨울의 말미에 만난 해운대 바다는 스산함이 아닌 따뜻하고 청량한 느낌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