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스윗홈, 30년 된 복도식 아파트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실평수 12평 남짓, 이제껏 살아본 집 중 가장 작은 크기의 집에 살며 나는 <즐거운 나의 집>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 연고 없는 동네의 작은 집에서 우리는 2년 10개월을 살았다.
남편은 집을 보지도 못하고 계약한 상황이라 세입자가 퇴거한 후에 처음 우리 집을 볼 수 있었다.
30년이 넘은 낡고 작은 집이었지만 나는 이 집을 우리의 스윗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남편은 자기 방이 없어진 것에 대해 굉장히 실망했지만 작은 방 하나, 큰 방 겸 거실 하나, 주방과 화장실이 마주 보고 있는 집에 남편 방을 만들어 줄 여유는 없었다. 이 집을 떠날 때까지도 우리는 큰 방의 호칭을 두고 실랑이를 했다. 그 공간을 남편은 '거실'이라 불렀고 나는 '큰 방'이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결국 '큰 방 겸 거실'이라 부르기로 했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3주 정도 시간이 있어서 반셀프로 집을 손보았다. 도배, 장판, 싱크대, 전등은 각각 업체를 불렀고 방문, 현관문 페인트칠과 청소는 우리가 직접 했다. 화장실은 새카만 곰팡이가 하얀 실리콘 뼛속까지 침투해 있었지만 도기와 타일은 멀쩡해서 그냥 수리해서 쓰기로 했다. 곰팡이는 며칠에 걸쳐 뿌리를 뽑아냈다. 2천만 원 정도면 깨끗하게 올수리 할 수 있었지만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집을 샀기 때문에 수리에 투자할 돈은 없었다.
마무리로 도배하는 날, 도배 사장님께 집을 맡기고 나왔는데 금세 전화가 왔다.
"네? 왜요?"
"벽지를 뜯어보니까 벽이 너무 낡아서 다 부서졌어요. 목공작업을 먼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집에 가보니 뜯어진 벽지 뒤로 벽에 덧댄 나무가 부서지고 그 사이로 벽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도배 사장님은 다시 오기로 하고, 급하게 목공 작업해 주실 분을 섭외했는데 운 좋게 황금손 사장님을 만났다. 며칠 후 다시 온 도배 사장님도 대번 알아봤다. "오, 목공작업 어디서 하셨어요? 훌륭한 기술자를 만나셨네!" 돈은 70만 원 정도 더 들었지만 목공 사장님은 그 이후로도 우리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든든한 인연이 되어주셨다.
살면서 몸소 부딪혀 경험하며 알게 된 건, 삶에 고난이 닥쳤을 때가 귀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혼 후 난생처음 겪는 일로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늘 귀인들이 나타나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었다.
우리의 두 번째 스윗홈으로 이사하는 날, 나는 일을 뺄 수 없는 상황이라 남편이 연차를 냈다. 일을 마칠 무렵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엥? 왜??? 무슨 일 있어???"
"짐을 놓을 데가 없어. 이삿짐센터분들도 난감해하고 계셔."
"아~ 걱정하지 마! 내가 가서 싹 정리할게. 사장님 바꿔줘 봐."
널찍하게 빠진 33평 빌라에서 쓰던 살림살이를 12평 아파트로 옮겨오려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사장님! 침대는 작은 방에, 소파랑 테이블, 시스템 행거는 큰 방에, 나머지 짐은 거기 어디에 그냥 쌓아두세요."
"아이고,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집이 너무 작아서 이게 참.... 허허허"
"괜찮아요! 제가 정리할게요."
이사가 마무리될 무렵, 집에 도착하니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을 공간도 없이 온통 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삿짐센터 분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짐 사이사이에 어정쩡하게 서계셨다. 이삿짐센터분들은 우리를 잠시 걱정해 주시다가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른 퇴근을 하셨다. 나중에 보니 새로 깐 장판에 흉측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바로 연락해 보았지만 '다림질을 해보셔라.'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처음 이사계약할 때 믿음직스럽게 꺼내보였던 1억 상당의 책임 보험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혼 전에는 몰랐지만 다행히 나는 집 정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집 정리는 창의성이 필요한 일이다.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편리하고 아늑한 공간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행으로 옮기며 공간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이사 온 후 한동안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괴력을 발휘하며 혼자 짐을 옮기고 집을 정리했다.
집도 내 마음을 아는지 점점 아늑하게 변해갔다.
집이 작은 덕분에 집 안의 모든 공간에 눈길을 주며 살았다. 내 손길이 닿지 않고 덩그러니 방치되는 공간은 없었다. 현관문에서 작은 방까지 한 걸음, 작은 방에서 주방까지 두 걸음, 주방에서 화장실까지 두 걸음, 화장실에서 큰 방까지 두 걸음 남짓. 무선청소기로 쓱쓱 몇 번 문지르면 청소도 끝이었다. 작은 집에 사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주방과 큰방 사이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은 여닫을 때마다 지하철처럼 쿠릉쿠릉 요란한 소리를 냈고, 화장실 문은 오래되어 완전히 닫히지 않고 헤 벌린 입처럼 늘 조금 열려 있었다. 그 모든 게 우리 부부에게는 개그 소재로 활용됐다.
아파트가 지하철역이랑 1분 거리인데 게다가 지상철이라 규칙적으로 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쿠궁쿠궁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차여행이 떠올라 설렜다.
우리 옆집엔 '파뤼피플'(남편과 내가 붙여준 별명)이 살았다. 사실 피플은 아니고 혼자 사는 40대나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분인데 친구가 어찌나 많은지 이 작은 집에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친구들을 초대했다. 친구들은 파티장소에 도착하면 벨을 누르지 않고 문 앞에서 '나야~' 하고 친구를 불러냈고, 파티는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늘 즐겁게 놀았다. 좀 시끄럽긴 했지만 남편과 나는 "오늘 또 파티가 열렸나 보군. 열정이 정말 대단해." 하고 웃어넘겼다. 그녀의 체력과 사교성을 본받아야 한다고 반성하며 잠이 들곤 했다.
작고 아늑한 공간도 좋았지만, 이 작은 집의 묘미는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있었다.
내가 처음 집을 보고 반했던 뒷 베란다 풍경은 이 집에 사는 내내 큰 기쁨이 되어주었다. 뒷 베란다 문을 열면 코앞에 낮은 산이 있었다. 산에 있는 벚꽃나무와 소나무, 이름 모를 나무들 덕분에 밖에 나가지 않아도 창문으로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아침이면 새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어찌나 열심히 노래를 하는지, 다른 일을 하다가도 멈추고 꼭 밖을 쳐다봐야 했다.
여름에는 현관문과 베란다문을 동시에 열어두면 선풍기 날개가 혼자서 씽씽 돌아갈 만큼 바람이 잘 통했다. 작은 집안 구석구석을 바람이 씻어주는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덕분에 베란다에 달아둔 대나무 모빌이 내는 똥땅똥땅 소리를 듣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수납공간이 없어서 베란다는 짐으로 가득 찼지만, 남은 한 구석에 캠핑의자를 펼치고 앉아 풀내음 맡으며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다.
창문 없는 복도식 아파트라서 누릴 수 있는 기쁨도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현관문을 열자마자 탁 트인 하늘과 멋들어진 산줄기, 알록달록 나무들이 눈앞에 선명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복도를 걸으며 하루가 저물어가는 풍경에 매일 감탄하기 바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산에 걸쳐진 안개가 운치 있었고 비에 젖은 나무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눈이 오면 황홀경에 빠졌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여름이면 집게벌레처럼 생긴 친구가 복도를 기어 다녔고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전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자연을 가까이에서 누리는 기쁨이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집을 나설 때면 뒤돌아보며 집에게 인사를 했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홈 스윗 홈~'을 외쳤다.
물론 우리의 스윗홈에 살며 좋은 일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집에 사는 내내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마음이 탁 풀리는 집, 작고 한없이 안락한 집에서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버틸 수 있었다.
열두 평 작은 집 덕분에 인생의 쓰나미를 겪으면서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우리 가정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
글을 쓰며 옛집의 풍경과 다시 마주하니 울컥합니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오롯이 책임지고자 고군분투했던 날들, 주어진 환경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내려 애썼던 날들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준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 눈물을 흘리기엔 이르지요. 작은 집에 살며 겪었던 쓰나미 같은 인생 이야기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