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들이 하루 전 물난리 난 신혼집

빨간 벽돌집의 로망

by 스텔라윤



"저는 빨간 벽돌집이 예뻐 보이더라고요!"


"허허. 특이한 로망이네요. 빨간 벽돌집은 대체로 '낡은 집'이라는 건데...."


네 살 때부터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았던 내 눈에는 층이 낮은 빌라가 안정감 있어 보였다. 부모님 또래인 부동산 소장님들이 속으로 얼마나 혀를 찼을까.



2018년,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던 어느 날 부모님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근처 부동산에서 빌라 전세 매물을 보게 됐고 첫눈에 마음에 쏙 들었다. 기존에 그 집에 살고 있던 엄마 또래의 세입자는 인적이 드문 동네에 제 발로 찾아온 나를 반색했다.


"이 집이 터가 좋아. 내가 장담해요! 우리 딸이 아기가 안 생겨서 마음고생을 했는데 이 집에 들어와서 살면서 아들도 낳았다니까."


어수선한 가운데 그 집은 우리의 첫 신혼집이 되었다.


빨간 벽돌집의 로망



결혼식은 9월이었지만 5월에 미리 전세 계약을 하고 집에 어울리는 가구를 하나 둘 들였다. 엄마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최대 8인까지 앉을 수 있는 넉넉한 원목식탁, 날씬한 우리 둘이 대자로 뻗어 잘 수는 킹 사이즈 침대, 폭이 깊은 예쁜 색깔의 소파'와 같은 또 다른 나의 로망을 차근차근 채워갔다. 넓게 빠진 30평대의 빌라라서 8인용 식탁과 킹 사이즈 침대, 4인용 소파를 들여도 허전해 보일 만큼 공간이 남았다.


가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며 옆집 아줌마는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후미진 동네에 왔냐고 말했지만, 로망실현에 푹 빠진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전세여도 벽지는 새로 해야 하지 않겠니?"


벽지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평소에 남이 입던 옷을 얻어 입는 것도 질색하시는 시어머니는 벽지라도 새것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권유'인 줄 알았는데 다섯 번쯤 벽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무'라는 걸 깨닫고 남의 집 벽지를 새로 발랐다. 그것도 실크 벽지로. 이미 큰 가구가 어느 정도 들어온 상태라서 보양작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도 벽지를 새로 하고 보니 확실히 깨끗하고 포근했다.


'그래, 어차피 4년은 살 거니까. 잘됐지 뭐.'


벽지뿐만 아니라 화장실 2개의 누런 색의 세면대와 욕조를 사포질 하고 하얗게 코팅했고, 콘센트도 새 걸로 바꿨다. 방마다 오래된 등이 침침하게 끔뻑거려서 LED 조명으로 싹 교체했다. 사실 처음 계약할 때부터 벽지와 조명 교체는 임대인에게 요청해 보았지만 그는 눈도 꿈쩍 않고 거절했다. 전세금을 1천만 원 깎아준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 있겠다며 수긍했다.


임대인은 신혼부부가 입주한다고 하니 내심 좋아했다. 우리는 임대인의 기대에 부응하듯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고 칠했다. 자취해 본 적도 없는 나는 처음 내 공간을 갖는 기쁨에 살림꾼을 자처했다.


살림꾼 코스프레



그렇게 신혼집 꾸미기 놀이에 푹 빠져 두어 달을 보냈고 드디어 우리의 첫 번째 '홈 스위트 홈'이 완성되었다. 거실에 앉아 아늑하게 꾸민 집을 둘러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벅찼다.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구나....'


우리의 첫 번째 홈 스위트 홈 / 분당 빌라 전세 (2018)



집 꾸미기를 마무리하고 친구들과의 집들이를 하루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나는 집들이 준비를 위해 차를 타고 마트에 다녀왔다. 남동향 집 거실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느지막한 오후였다. '홈 스위트 홈'을 외치며 중문을 열고 주방으로 걸어가는데 '참방'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양말이 뜨끈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뭐야 이 느낌...?'


서둘러 벽을 더듬어 불을 켰고 너무 놀라 '악' 소리도 나오지 않는 광경을 마주했다.



우리의 스위트홈 주방부터 거실, 안방까지 기름 둥둥 뜬 뜨끈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

.

.

.





첫 번째 집(빌라)에 살며 좋았던 점

1. 네 동의 빌라가 단지를 이루고 있어서 아늑함

2.세대마다 지정 주차 1대씩 가능

3. 방 3 화장실 2, 주방과 거실이 확실히 구분된 구조

4. 빌라라서 평수보다 집이 더 넓게 빠짐

5. 산과 밭이 있는 동네라 한적하고 조용함


살아보니 불편했던 점

1. 경비실, 관리실 없음

2. 세대마다 돌아가며 분리수거 거치대를 설치하고 수거해야 하는 문화

3. 고립된 동네라 걸어서 나갈만한 곳이 없음 (상가, 공원 없음)

4. 역시 고립된 동네라 퇴거할 때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임

keyword